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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祖師禪의 修行과 信心의 관계 / 김호귀

곰선생=태화 2013. 10. 2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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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師禪의 修行과 信心의 관계

 

 

김호귀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목 차 ?

 

Ⅰ 깨침의 강조

Ⅱ. 菩提達磨의 壁觀修行 - 深信

Ⅲ. 大慧宗?의 看話禪修行 - 話頭

Ⅳ. 宏智正覺의 ?照禪修行 - 坐禪

Ⅴ. 맺는 말

 

 

Ⅰ. 깨침의 강조

 

선의 목적은 깨침이다. 그 깨침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인적 구성을 중심으로 일정한 교의와 의례가 포함되어 형성된 집단이 선종이다. 그래서 선종의 근본은 선을 위주로 하면서 어디까지나 깨침이 가장 중시되어 왔다. 선종은 그만큼 깨침을 강조하는 종파로서 지혜와 자비를 내세우는 불교의 성격을 가장 잘 구현해 온 집단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어느 종파 내지 종단보다도 깨침을 강조해 왔다.

 

깨침의 행위는 곧 지혜의 터득이다. 지혜는 자비와 더불어 불교를 지탱하는 큰 축이기도 하다. 바로 그와 같은 지혜의 터득은 나아가서 올바른 자비심을 구현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혜의 완성을 추구하는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처음에 제시한 질문이 바로 어떻게 發心[云何發心]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1]

금강경에서의 발심이야말로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행위인 수행의 시작을 가리킨다. 곧 발보리심이다. 그만큼 발심은 지혜, 나아가서 깨침을 겨냥한 행위로서 필수불가결한 행위이다. 그래서 깨침을 추구하는 선에서는 제일먼저 발심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그 발심의 이면에는 다름아닌 신심이 자리하고 있다. 신심이 없는 발심은 찰나적이고 가변적이며 순간적인 객기이다. 따라서 신심은 곧 발심으로서 모든 수행과 깨침의 바탕이다.

 

1]天親 造, 菩提流支 譯, ?金剛般若波羅蜜經論? 卷上, (大正藏25, p.781下) “世尊 云何菩薩大乘中發阿?多羅三?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修行 云何降伏其心”

 

 

이처럼 깨침을 추구하고 강조하는 선의 입장에서 선이 종파를 형성하기 이전 곧 선의 수행법이나 선법 내지 선사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던 인도불교의 경우에는 더욱더 깨침이 중시되었다. 그러나 선이 시대의 변천과 지역의 확대 등에 따라 하나의 집단화되면서부터 깨침을 바탕으로 하여 그 전법 내지 전승이 더욱더 중요시되었다. 그래서 어떤 깨침을 터득했느냐보다는 누구로부터 인가를 받았느냐가 중시되었다.

곧 깨침은 어디까지나 스승의 지도를 받기는 하지만 스스로가 터득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내증의 문제이지만 전법 내지 전승의 인가는 그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로부터 인가받았는가 하는 점은 곧 대의와 명분을 중시했던 사회에서는 자체의 집단이 생존과 번영을 구가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가장 중요한 명제였다. 이로써 선종에서는 깨침은 전법의 필요조건으로서 중시되었다.

 

나아가서 붓다의 본의가 지혜와 자비에 바탕한 중생제도라는 최상승과 대승을 표방하면서 불조혜명의 계승을 내세우는 선종에서는 전법으로만 그 본래적인 의의를 다할 수는 없었다.2]

이로써 전법의 중시는 당시의 사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발휘했느냐 하는 대중의 접화라는 조건을 아울러 중시하게 되었다. 깨침과 전법은 각각 대중을 접화하고 집단을 유지해 나아가기 위한 매우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접화라는 교화의 직접적인 목적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에서 집단을 이끌어 나아가고 제자를 배출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야말로 보다 현실적이면서 명분을 내세울 수 있는 전법의 궁극이기도 하였다.

 

2] 명목상으로 선종의 시작을 보리달마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출발은 보리달마가 중국에 도래한 본래의도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祖師西來意로 대변되는 화두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보리달마가 인도에서 동진한 것은 대승의 선법을 전승하기 위해서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 깨쳤느냐 그리고 누구에게서 인가받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역할을 하였고 어떤 교화를 했는가에 따라서 당시의 대중들과 사회로부터 호응을 받는 척도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깨침과 인가와 전법과 교화의 근본에는 언제나 신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신심은 다름아닌 깨침의 바탕이었고 전법과 교화의 원력이었다.

 

이와 같은 일군의 선풍이 소위 祖師禪이었다. 조사선의 가풍으로 실제로 형성되고 전개된 것은 당나라 시대였다. 이 조사선은 사상적으로는 보리달마를 필두로 하는 조사들의 계보를 바탕으로 하여 초기선종시대에 중시되었던 ?楞伽經???般若經???維摩經???涅槃經???華嚴經? 등에 근거하였다.

다른 한편 조사선의 실천적인 측면으로는 당나라 시대에 최고조로 발전된 사상은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고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점으로 나타났는데 소위 새로운 수행방식의 창출이었다. 그것이 곧 남송 말기 북송 초기에 걸쳐 본격적으로 등장한 看話禪과 ?照禪이었다.

이에 보리달마를 위시하여 간화선과 묵조선에서의 수행의 양상과 그것이 신심과 어떤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Ⅱ. 菩提達磨의 壁觀修行 - 深信

 

중국의 선종사에서 보리달마는 선종의 鼻祖라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독특함으로도 충분히 초조로서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 중국불교사에서 달마의 공헌이라면 우선 대승의 선법을 전하여 당시에 불교계에서 일종의 도그마화 되어가던 교학의 권위에 대하여 과감한 도전을 가한 점이다. 이것은 인도에서 6종의 종파에 대한 사견을 부수고 정법을 구현하는 곳3]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선명한 사상적 특징은 ?壁觀?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이 벽관은 관법으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독특한 사상적 특징인 二入으로 잘 드러나 있다. 곧 여기에서 그의 벽관이 二入으로 드러나 있다는 것은 二入 전체가 벽관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마는 분명히 선법을 실천하고 전승하는데 그의 전 생애를 바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실천은 무엇을 어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무엇을 위한다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저술에서 果 곧 깨침의 공능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3] 達摩의 六宗對破에서 六宗이란 다음과 같다.[?傳燈錄? 卷3, (大正藏51, p.217中)] 有相宗:유물론자에게 진리의 相인 實相을 말함. 無相宗:一切를 부정하는 虛無論者에게 禪定三昧에 투철케 함. 定慧宗:唯物論者에게 바른 理智를 보임. 戒行宗:계행론자에게 청정한 戒를 가르침. 無得宗:회의론자에게 진실한 입장에서 無得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함. 寂靜宗:唯心論者에게 禪宗의 입장에서 적정을 알도록 함.

 

 

달마는 ?二種入?에서 선법의 깨달음과 실천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入?이라는 용어는 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 혹은 이미 들어가 있다는 완료의 의미에서 깨침의 당체를 의미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깨침의 행위 곧 실천을 의미하기도 한다.

 

달마 ?二種入?의 내용은 二種의 入으로서 理入과 四行의 의미가 설명되어 있다. 이 가운데 理入에 대해서는 지극히 간략하면서도 극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 理入에서 理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해당하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입이란 무엇인가. 불법의 가르침에 의해 불교의 근본적인 취지를 깨치는 것이다. 중생은 성인과 동일한 진성을 지니고 있음을 深信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생은 단지 객진번뇌에 망상에 뒤덮여 있어 그 진성을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만일 객진번뇌의 망념을 제거하여 진성을 지니고 있음을 深信하는 곳에 돌아가 올곧하게 壁觀을 통하여 자타의 구별이 없고, 범부와 부처가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경지에 굳게 머물러 변함이 없으며,

또한 다시는 조금도 문자개념에 의한 가르침에 휩쓸리지 않는다면, 바로 그 때에 진리와 하나가 되어

분별을 여의고 고요한 무위에 도달한다. 이것을 理入이라 한다." 4]

 

4] 이하 ?二種入?은 ?楞伽師資記?(大正新脩大藏經85)에 수록되어 있는 것에 의한다.

“理入者 謂藉敎悟宗 深信含生凡聖同一眞性

但爲客塵妄覆 不能顯了

若也捨妄歸眞 凝住壁觀 自他凡聖等一 堅住不移

更不墮於文敎 此卽與理冥符

無有分別 寂然無爲 名之理入”

 

 

여기에서 理入은 깨침에 들어가는 이론이라든가 수행의 과정이 아니다. 곧 ?불교의 근본적인 취지를 깨치는 것?을 말한다. 그 방법은 ?불법의 가르침에 의해서?와 같이 불법의 가르침에 의해서 불법의 가르침인 그 근본 취지를 깨치는 것이다. 이것은 불법으로서 불법을 깨치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이란 곧 깨침이다. 바꾸어 말하면 깨침으로 깨침을 얻는 것이다. 이미 불법이 깨침으로서 출발하여 깨침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 깨침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중생은 성인과 동일한 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서 깨친다는 것이다. 중생과 성인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중생에게나 성인에게나 모두 불법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음을 말한다.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불법을 深信하는 것이 달마의 수행방식이다.

따라서 달마의 수행에는 이미 理入이 갖추어져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달마의 理入은 修行이고 修行은 理入이다. 理入이 불법을 깨치는 것, 곧 이미 깨쳐 있는 상태이므로 그것은 이론적인 깨침이 아니라 수행을 겸한 완성된 깨침이다. 그 수행방식이야말로 深信이다. 그런데 달마에게서 深信의 형태는 다름아닌 壁觀이다.

 

벽관의 구체적인 모습은 ?객진번뇌의 망념을 제거하여 진성에 돌아가 올곧하게 벽관을 통하여 자타의 구별이 없고, 범부와 부처가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경지에 굳게 머물러 변함이 없으며, 또한 다시는 조금도 문자개념에 의한 가르침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深信의 구체적인 형태인 벽관의 내용이 드러나 있다.

 

첫째는 ?자타의 구별이 없고?,

둘째는 ?범부와 부처가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경지에 굳게 머물러 변함이 없으며?,

셋째는 ?다시는 조금도 문자개념에 의한 가르침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다.

?자타의 구별이 없고?는 분별심을 내지 않는 것이다. 理入으로 깨침이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중생이니 성인이니 수행이니 깨침이니 하는 분별은 의미가 없다. 그 무분별한 마음으로 ?범부와 부처가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경지에 굳게 머물러 변함이 없는? 것이야말로 深信의 또 다른 형태이다. 곧 벽관은 深信을 통한 벽관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深信을 통한 벽관은 ?다시는 조금도 문자개념에 의한 가르침에 휩쓸리지 않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문자를 통하여 진리에 계합하는 것이다. 이것을 달마는 藉敎悟宗이라 하였다. 본래 ?理入이란 敎 곧 경전에 의지해서 종지를 깨친다?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敎를 매개로 하여 근본[宗]을 터득한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문자를 부정한다든가 여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敎內別傳 및 不離文字를 말한다.

이와 같은 藉敎悟宗에 의한 深信의 벽관은 필연적으로 깨침이 구현되어 있는 모습으로서 ?바로 그 때에 진리와 하나가 되어 분별을 여의고 고요한 무위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달마는 이것을 理入이라 말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진리와 하나가 되는 理入은 분별을 여의고 고요한 무위에 도달하는 것을 속성으로 삼고 있다. 분별이 없기 때문에 따로 自他 내지 凡聖이 없고, 고요한 무위의 경지이므로 객진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다. 그래서 理入은 深信을 통한 벽관의 具現일 뿐만 아니라 도한 벽관을 통한 深信의 자각이다. 따라서 深信과 壁觀과 理入은 깨침에 대한 달마 특유의 용어이면서 敎를 통한 깨침이라는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는 말이다.

 

어쨌든 深信은 구체적으로 마음이 미혹을 버리고 진실로 되돌아가는 벽관의 공부이다. 원문에서 말한 ?捨妄歸眞?의 妄은 深信이 결여된 미혹이다. 심신의 부재로부터 본래부터 있지 않은 것이 나타나는 妄으로 보이다가 심신의 터득으로 인하여 이제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미혹이란 본래부터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잘못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실을 망각하고서 본래부터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깨침이란 본래부터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고 보고 미혹으로 인하여 망각한 진실을 돌이켜 세우는 것이다. 특별히 이전에 없던 새로운 진실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망각했다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미혹이 없다면 새삼스레 깨칠 것도 없다. 본래의 진실은 依然하여 변함이 없다.

이와 같은 자각의 구조를 짐짓 ?捨妄歸眞?이라 한다. 저곳은 本來의 자리이고 지금 이곳은 非本來의 자리라는 분별의 미혹에서 벗어나 그 망념을 버리는 것이다. 頓悟라는 말은 바로 이 歸眞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본래자리에 수행형식으로 구분하는 돈오니 점수니 하는 뜻은 없다.

 

이와 같은 歸眞의 결과방식이 곧 深信이다. 理入은 진리의 실천구조 곧 깨침의 구조이다. 深信은 그와 같은 理入을 실천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深信의 信과 理入의 悟는 표리관계에 있다. 信은 自覺을 대상화시켜 표현한 행위이다. 범부도 성인도 모두 동일한 진실심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含生同一眞性의 구조이다. 곧 深信의 확립이 곧 理入이다. 다시 말하면 深信을 통한 理入의 확립이다. 여기에서 본래의 실천 곧 벽관이 시작된다. 그래서 벽관에는 자타와 범성의 차별이 없다. 無爲의 사실을 深信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달마가 말하는 信이고 心이며 깨침이다.

 

 

 

Ⅲ. 大慧宗?의 看話禪修行 - 話頭

 

역사의 숱한 종교들 가운데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깨침과 수행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타의 종교에 비하여 자신의 마음을 직접 밝혀 절대자의 구제를 받기보다는 스스로의 깨침을 추구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그 결과 그 깨침을 추구하기 위하여 수많은 수행방법을 창출하였다.

가령 기도?염불?주력?간경?참선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참선수행은 깨침에 나아가는 방법으로 일찍부터 중시되어 다양하게 개발되어 왔다.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진행되었던 관법을 비롯하여 중국에 건너와서 발전된 止觀修行, 그리고 宋代에 확립된 看話禪과 ?照禪의 출현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 간화선은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서 선종의 수행방식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5]

 

5] 그 발생은 온전히 중국적인 사유의 구조에서 등장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곧 인도에서의 선정수행은 제법의 생멸과 연기의 구조를 통한 직관에서 단계적으로 번뇌를 멸하고 지혜를 개발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그래서 선정의 삼매에 있어서도 마음에서 나타나는 변화에 따른 단계를 설정하여 많은 禪理의 천착이 있었다. 이와는 달리 중국에서 전개된 전종의 경우에는 깨달음에 단계성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을 밝혀 곧장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돈오의 입장도 아울러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깨달음의 구조를 논하기보다는 우선 깨달음의 성격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하여 추구되는 깨침의 성격이란 깨침 자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규명이 아니다. 오히려 수행을 통한 결과로서 도달된 상태에서 깨침을 어떻게 규정짓느냐에 대한 것이었다.6]

그러나 깨침의 성격상 무엇이라 언급하는 것을 꺼려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그렇게 言詮不及의 대상으로 묻어 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여타의 종교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논의를 부정하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붓다의 정체성 곧 佛身 자체까지도 문제로 삼아 논하는 것이 그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7]

이와 같이 어떤 매개체를 통하여 그것을 언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체험을 통하여 맛보는 것으로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에 양보해두는 방식이 고안되었다. 그 방법으로 창출된 것 가운데 하나가 곧 간화선이었다.

 

6]왜냐하면 깨달음의 경지란 自內證의 경지로 간주하여 감히 이러쿵저러쿵 언급하는 것을 회피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었으나 꿈에서 본 것을 표현하지 못한 것과 같다. 꿈을 꾸었으면 언설로 표현이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이 깨달음에 대하여 비유나 상징을 통하여 어떤 측면으로든지 논증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 자체에 대한 논증을 회피해 온 것은 깨달음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言說不及이라는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논하는 것은 곧 그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縣崖想 때문이기도 하다.

7]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깨달음 자체에 대한 논증은 전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중국의 선종에서는 그 깨달음에 대하여 좌선을 통한 마음의 발견 내지 사물을 통찰하여 얻는 반야직관의 획득에 대한 頓漸이라는 과정상의 문제에 치중하였다. 곧 證보다는 修에 중점을 두었다. 그 과정에서는 다시 그 깨달음을 얻는 방법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곧 수행방식의 다양한 전개를 초래하게 되었다.

 

 

간화선의 수행방식은 인도에서와는 달리 지극히 중국적인 발상이다. 그것의 이유는 현실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성격과 함께 어울리면서 지극히 동적인 일상행위로서 구현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가 있다. 그와 같은 공안의 성립을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석존의 성도를 그 발단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중국에서 본격적인 선수행으로 등장한 것은 당대 말기이다.8] 이처럼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소위 간화선이었다. 그러나 후대 간화라는 본격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趙州?臨濟를 거쳐 大慧宗?에 이르러서 大成하게 된다.

 

이 때가 되면 불조의 기연이 定型化되어 수많은 화두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스승의 접화방식과 제자의 근기가 다양한 만큼 화두도 다양하여 일상의 생활 하나하나가 화두로 등장한다. 그러나 간화선이라는 일종의 화두참구를 으뜸으로 내세워 그것을 최고의 수행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9]

이와 같은 간화선의 핵심이 되는 공안에 대하여 그에 대한 체계 내지 단계적인 분류가 汾陽善昭에 의하여 최초의 공안집으로10] 등장하였고, 元나라 때 道泰 등이 편집한 ?禪林類聚? 20권11]에서는 공안에 대하여 종합적 체계적으로 주제별로 102 가지로 나누어 공안 5272則을 수록하였다.

 

8]?傳燈錄? 卷11 睦州道?의 傳記의 예. (大正藏51, p.291中) “師一日在廊階上立 有僧來問云 陳尊宿房在何處 師脫草?騫頭打 僧便走 師召云 大德 僧?首 師指云 ?從那邊去 有僧?門 師云 阿誰 僧云 某甲 師云 秦時鐸落鑽”

9]대혜는 화두를 드는 목적에 대하여 혼침과 산란을 제거하는 것과 화두를 활용해서 깨침에 도달하려는 것의 두 가지 목적을 제시하였다. 이런 점에서 대혜에게는 선수행에서 화두를 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깨침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邪禪으로 간주되었다.

10]?汾陽語錄? 卷中의 ?頌古代別? 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은 최초로 공안에 대하여 집대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大正藏47, pp.607下-619上)

11]卍續藏經 卷117 수록본에 의한다.

 

 

선의 생명은 불도를 수행하고 깨치는 것이다. 깨침이란 사량분별에 얽매이지 않고 천지우주와 자기가 하나가 되어 能所가 泯絶하여 所觀의 理와 能觀의 智가 不二一體가 되는 無碍淸淨한 작용이다. 이와 같은 작용으로 이끌어들이는 데에 사용된 선의 테크닉 가운데 하나가 곧 공안이었다. 따라서 공안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깨침으로 나아가는 도구 곧 수단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12]

 

이러한 간화선이 등장하게 된 필연적인 근거는 아무래도 올곧은 수행을 진행시키기 위한 모색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초심자가 좌선에서 겪는 가장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妄想으로 인한 散亂心과 寂寂空無에 떨어지는 ?沈을 쉽게 추스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것이 타성화되면 久參衲子라도 예외는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산란심과 혼침의 두 가지를 제거하기 위하여 제시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화두를 드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화두일념의 상태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생각대로 쉽게 화두가 들리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좌선이 습관적으로 몸에 배지 않은 탓이고, 둘째는 경험이 부족한 까닭이며, 셋째는 화두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의 부족이고, 넷째는 마음을 간절하게 화두에 매어두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와 둘째는 자꾸자꾸 반복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극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셋째는 발심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어 일단 구도심을 낸 사람이라면 그 지속성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넷째의 화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당사자가 의도적으로 정신을 집중하는 수련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근기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산란심과 혼침이라고 둘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이 둘은 그대로가 자신의 本地風光이고 本來面目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13]

 

12]이에 대해서는 공안이 수행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가령 공안수행의 경우 心一境性의 경지가 되어 공안을 참구하는 당사자와 공안 사이에 따로 구별이 없어지는 話頭一念의 경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공안은 그 목적이 처음 산란심과 혼침을 제거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공안의 위상까지도 초탈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안이 수단적인 성격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13]왜냐하면 본래 산란심과 혼침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상 독송하는 경전에서도 ?죄는 본래부터 자성이 없고 마음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다[罪無自性從心起]?라고 하듯이 산란심과 혼침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산란심과 혼침을 굳이 없애려 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본래 허망한 것인 줄 알고 나면 더 이상 산란심과 혼침은 떠오르지 않는다. 산란심과 혼침이 생기는 것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란심과 혼침을 동시에 해결하고 나아가서 본래의 면목을 구현하는 방식의 수단으로도 간화선에서는 화두를 든다.14] 이러한 화두수행을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 일찍이 大慧宗?는 ?辨邪正說?을 제시하였고15], 高峰原妙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16]

 

대혜가 ?辨邪正說?에서 妙圓道人에게 제시한 8가지 원칙 가운데 여덟 번째의 항목은 ?信을 지녀라. 話頭를 들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수행하는 당사자가 스스로가 직접 해야 할 일로서 언급된 것이다.

 

 

" 만약 생사와 고해를 초월하고자 하면 마땅히 정진을 일으켜 信을 지녀야 합니다. 信이 있는 곳에 곧 생사와 고해를 초월하는 소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信은 깨침의 으뜸이고 공덕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信은 일체의 모든 선근을 길러준다. 信은 생사의 고통을 멀리 여의게 한다. 信은 반드시 여래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17]

 

 

14]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화두일념의 상태에 드는 것이 쉽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생각대로 쉽게 화두가 들리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좌선이 습관적으로 몸에 배지 않은 탓이고, 둘째는 경험이 부족한 까닭이며, 셋째는 마음을 간절하게 화두에 매어두지 않기 때문이고, 넷째는 화두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의 부족이다. 첫째와 둘째는 자꾸자꾸 반복을 통해서 어느 정도 극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넷째는 발심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어 일단 구도심을 낸 사람이라면 그 지속성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셋째의 화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당사자가 의도적으로 정신을 집중하는 수련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15]졸고, ?大慧의 ‘辨邪正說’ 小考?, (?불교학보? 제39집,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6]高峰原妙는 ?高峰和尙禪要?, (卍續藏122, p.714上-下)에서 大信根?大疑問?大憤志의 세 가지를 화두수행의 기본원칙으로 내세웠다.

17]智省이었던 李大性의 부인. 속명은 姜善寶이다. 여기에서 인용된 두 경문의 출처는 각각 ?華嚴經? 卷14, (大正藏10, p.72中), 위의 책, (大正藏10, p.72中) 등이다.

 

 

대혜는 또 信에 근거하여 화두를 들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래의 경지를 알고자 하면 信만 지니고 있으면 됩니다. 이미 信을 지니고 있다면 굳이 마음을 일으켜 생사를 벗어나고자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하루종일 信의 여의지 않고 반드시 손안에 꼭 쥐고 있으면 그것이 곧 용맹지사입니다. 만약 반신반의하면 信이 상속되지 못합니다. 깨침이라는 것은 남녀?귀천?大小(어른과 아이)를 막론하고 평등일여합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法華會上에서 단지 한 여성을 성불시켰을 뿐입니다. 그리고 열반회상에서는 또한 단지 한 廣額屠兒를 성불시켰을 뿐입니다.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의 성불은 다른 공용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곧바로 信으로 성불시켰을 뿐 다른 第二念은 없었습니다. 앉아 있는 그 자리에서 報化佛을 넘어 곧바로 생사를 벗어난 것일 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묘원도인께서는 비록 여성이기 합니다만 그 立志는 위에서 성불한 여자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기특한 인연을 알아서 결정코 생사의 因을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편지를 통해서 간절히 저한테 가르침을 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는 묘원도인을 위하여 붓을 들고 정성을 기울여 글을 통해서 그 가르침을 드리는 것입니다. 권하노니 부디 화두를 드십시오."18]

 

18]졸고 ?大慧의 ‘辨邪正說’ 小考?, (?불교학보? 제39집,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재인용. 위에서 인용한 경문의 출처는 각각 ?法華經? 卷4, (大正藏9, p.35中-下) ; ?涅槃經? 卷17, (大正藏12, p.722中) 등이다.

 

 

대혜는 또 信에 근거한 화두의 예를 ?한 승이 마조에게 물었다.

 

“佛이란 무엇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그대의 청정한 마음 그것이 곧 佛이다.”?19] 라고 말하고,

또한 ?妙圓道人께서는 일상생활에서 이것을 화두로 드십시오. 계속 정진하시길 바랍니다.?20]라고 말한다.

 

이처럼 대혜는 다른 여러 곳에서 信을 般若 곧 지혜와 동일시하였다. 지혜가 없는 것을 信이 없는 것과 동일시하여 생사를 벗어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건으로 규정하였다. 나아가서 學道에 半進半退하는 것은 決定信이 없기 때문으로 진단하였다. 禪은 般若의 異名이요 범어 반야는 곧 지혜를 말한다고 하면서 수행하는 당사자가 決定信도 없이 그리고 지혜도 없이 생사를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것은 語不成說21]이라 하였다.

 

19]?傳燈錄? 卷7, (大正藏51, p.254下)

20] ?大慧語錄? 卷23, p.909中. 여기에서는 특히 “信을 지녀라. 卽心卽佛의 화두를 들라”는 것에 대하여 당부하고 있다.

21]?大慧語錄? 卷19, (大正藏47, p.894上),

“今時士大夫學道 多是半進半退 於世事上不如意 則火急要參禪 忽然世事遂意 則便罷參 爲無決定信故也

禪乃般若之異名 梵語般若 此云智慧 當人無決定信 又無智慧 欲出生死 無有是處

또한 의의 책, 卷20, ?示無相居士?, (大正藏47, p.894上)에게 행한 설법에서도 決定信에 대하여 간절하게 설하고 있다.

 

 

대혜는 위와 같은 辨邪正說을 요약하여 佛病?法病?衆生病이라 말하고 있다.

佛病은 善巧方便을 지니지 못하고서 방편을 그대로를 만능으로 간주하는 잘못과 범부행위까지도 일상생활 그대로가 깨침이라 하여 無事甲裏에 떨어지는 잘못을 가리킨다.

法病은 언설을 통한 갖가지 잘못으로서 곧 言語相?文字相?知解分別相에 떨어져 있는 것과 방편의 가르침을 방편인 줄 모르고 實로 간주하는 잘못을 말한다.

衆生病은 중생이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속성으로서 分別思識과 不信疑惑과 迷惑愚癡를 말한다.

 

이와 더불어 대혜는 무자화두를 강조하면서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잘못된 사항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언급하였다.

 

 

"조주는 ‘개한테 불성이 있습니까’ 라는 한 승의 질문에 대하여 ‘無’라 답하였다.

이 無字야말로 허다한 惡知惡覺을 물리치는 무기이다.

有無의 도리로 알려고 하지 말라. 도리를 통해서 알려고 하지 말라.

뜻으로 사량하거나 헤아리지 말라.

눈썹을 치켜올리거나 눈동자를 깜박거리는 제스처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말장난을 통해 어찌 해보려고 하지 말라.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을 능사로 삼지 말라. 화두를 드는 그 자체로 알려고 하지 말라.

문자를 동원하여 꿰어맞추려고 하지 말라.

다만 하루종일 어묵동정에 무자를 잊지 말고 무자를 들고 있어라." 22]

22] ?大慧語錄? 卷26, (大正藏47, p.921下),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無 此一字子 乃是?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

不得作有無會 不得作道理會

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不得向揚眉瞬目處?根

不得向語路上作活計

不得?在無事甲裏 不語向擧起處承當

不得向文字中引證

但向十二時中四威儀內 時時提? 時時擧覺”

 

 

이와 같은 언급은 無字에 대한 크나큰 信心을 바탕으로 한 화두 드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高峰原妙가 제시한 세 가지 원칙은 信心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화두 자체와 화두를 통해 깨침을 터득하려는 수행의 운용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만약 착실하게 참선을 한다고 말할려면 반드시 세 가지를 구족해야 한다.

첫째는 대신근이 있어야 한다. 분명히 알라. 깨침은 마치 그 자리가 수미산에 기대고 근거해 있는 것과 같다. 둘째는 대분지이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만났을 때 곧바로 일도양단하려는 것과 같다.

셋째는 대의정이다. 이것은 마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큰 일을 저질러 은폐되었던 일이 막 폭로되려고 하는 것과 같은 때이다."23]

23] ?高峰和尙禪要? (卍續藏122, p.714上-下),

“若謂着實參禪 決須具足三要

第一要有大信根 明知此事如?一座須彌山

第二要有大憤志 如遇殺父寃?直欲便與一刀兩斷

第三要有大疑情 如暗地做了一件極事 正在欲露未露之時”

 

 

大信根은 화두 자체를 믿음과 함께 화두를 제시해 준 스승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다. 자신이 화두수행을 통해서 반드시 깨침에 이른다는 사실과, 화두수행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자기자신을 통째로 믿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인과법만큼이나 명확한 명제이기도 하다.

 

大疑問은 大信根의 바탕 위에서 화두 자체에 대한 의문을 지니는 것이다. 자신이 해결해야 할 지상의 과업으로서 화두를 들어 그것을 투과할 때까지 내 머리를 내어줄 것인가 화두의 의문을 해결할 것인가 하는 치열한 행위이다. 여기에서의 의문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다.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의문으로서 그 누가 대신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철저한 체험을 통하여 스스로 冷暖自知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의문이 더 이상 의문에 머물러 있지 않고 확신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까지 잠시도 방심하지 않고 오매불망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화두가 자신을 참구하는 경험을 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화두가 하나가 되는 경험이 화두일념이다. 화두일념을 통하여 더 이상 자신과 화두라는 분별과 그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지속적으로 밀고 간다. 여기에서는 화두 이외에 부처도 조사도 용납되지 않는다.24] 오로지 화두만 있을 뿐이다. 거기에서 화두를 들고 있는 자신은 항상 惺惺歷歷하고 空寂靈知하는 것이 중요하다.

 

大憤志는 위의 화두를 줄기차게 진행시켜 나아가는 정진이다. 단순하게 의문만 가지고는 오래 계속하지 못한다.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맹세 내지 오기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화두를 들다가 죽을지언정 화두에서 물러나지 않으려는 고심참담한 노력이다.

 

그러나 화두를 드는데 있어서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화두에 대한 의문방식이 ‘왜’가 아닌 ‘무엇’이라는 것이다.25] 곧 ‘왜 조주는 개한테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라는 의문이 아니다. 이것은 화두에 대한 분별심만을 키울 뿐이다. ‘왜’라고 묻는 것은 과학이고 수학일 뿐이다. 화두는 과학도 아니고 수학도 아니다. 논리를 초월한 소위 초월논리이다. 따라서 반드시 ‘조주가 개한테 불성이 없다고 말했다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는 해답을 기다리는 질문이다. 이미 제기된 질문[화두]에 대하여 대신근이 결여된 상태에서의 질문일 뿐이다. 그러나 ‘무엇’의 장식은 특별한 해답을 요하지 않는다. 이미 제기된 질문[화두]에 대한 대신근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참구방식이다. 그래서 狗子無佛性話라는 것에 대하여 ‘그것이 무엇인가.’ 라는 참구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24] ?臨濟錄?에서 말하는 殺佛殺祖라는 말은 바로 화두의 참구에서는 부처와 조사라는 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한 것이다.

25]졸고, ?금강경과 선종의 공안 -그 구조를 중심으로-?, ?韓國禪學? 제3호, 한국선학회.

 

 

화두에 대하여 ‘왜’ 라는 접근방식은 분별망상일 뿐이다. 하나의 화두에 전념하면 그것이 내면에 깊숙하게 의문덩어리로 자리잡게 된다. 여기에서 그 의문을 지속적으로 진행시켜 나아가다 마침내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생긴다. 이것이 화두타파의 기연이다.

 

그런데 이 화두타파의 기연에는 반드시 필요한 자세가 절대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의 결심이다. 불퇴전을 통해서 나아가는 깨침은 본래부터 자신에게 있었음을 자각하여 그대로 익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다. 어디서 빌려오거나 한순간에 퍼뜩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특별히 경계의 대상이 된다. 그대로 앉아서 화두를 든다든가 좌선을 하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화두를 통해서 좌선을 통해서 깨침이 얻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곧 待悟之心을 가져서는 안된다26] 라든가 깨침을 법칙으로 삼아야지[以悟爲則]27]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26] ?大慧語錄? 卷26, (大正藏47, p.923下)

27]?大慧語錄? 卷30, (大正藏47, p.939中)

 

 

이 점에 대해서 혜심도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할 점, 즉 간병론에 관하여 위의 ?狗子無佛性話看病論? 뿐만이 아니고, 그의 어록에서도 항상 깨침을 기다려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곧 ?宗敏上人에게 보이는 글?에서도 “또 미혹으로써 깨치기를 기다리지 말라.”28]고 표현하고 있고, ?淸遠道人에게 보이는 글?에서도 “한결같이 눈을 감은 채 空空寂寂하게 흑산귀굴 속을 향하여 앉은자리에서 깨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29]고 말하며, ?空藏道者에게 보이는 글?과 ?大休上人에게 보이는 글? 등에서도 화두참구의 주의점을 열거하면서 “미혹으로써 깨치기를 기다리지 말라.”30]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28] ?曹溪眞覺國師語錄?, (韓佛全 6, p.25下), “亦莫將迷要悟待”

29] ?曹溪眞覺國師語錄?, (韓佛全 6, p.27上), “一向閑眉合眼 空空寂寂 向黑山下鬼窟裏 坐地待悟”

30] ?曹溪眞覺國師語錄?, (韓佛全 6, p.31下 ; p.33下), “不得將迷待悟”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大疑團이 아니라 한낱 쓸데없는 분별심일 뿐이다. 待悟之心은 모든 知解의 근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을 아직 깨치지 못한 중생으로 미혹 가운데에 자승자박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깨침을 얻기 위해서 갖가지 계교나 사량분별 및 허망한 노력을 하게 만드는 근원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오지심의 부정은 철저하게 知解를 타파하여 대오지심이 없이 자신이 곧 부처임을 확신하고 드는 간화, 즉 더 이상 깨침에 있어서까지도 얽매이지 않는 대의단의 행위이다. 이것은 곧 자신이 곧 부처라는 확고한 신심을 바탕으로 하여, 일체 지해의 근원인 待悟之心을 타파한 상태에서 오로지 화두에 전념하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 知解의 근저에 다름아닌 待悟之心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리고 나면 더 이상 그에 대한 집착이 없어 깨침에 대한 번뇌가 사라진다. 이것은 무심하게 화두를 들라는 것이다.

간화선법의 기본정신은 곧 무심이다. 무심의 상태가 깨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무심이라는 생각까지도 없어야 참다운 무심이라 하였다. 무심한 후에도 간화를 해야 하며, 또한 간화를 통하지 않고는 상대적인 무심으로 흐를 염려가 있다. 곧 간화선 곧 공안선은 어떤 문제를 제시하여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제시하는 방법으로서 無心合道의 현현이다. 때문에 하나의 화두 이외에 어떤 화두가 다시 필요하지는 않다.

 

진리가 온 우주에 遍在하므로 항상 우리 주변에서 이를 체득해야 함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화두를 드는 것이야말로 일상생활에서 항상 가능하다. 만일 일상생활에서 떠나 따로 나아가는 길이 있다면 찾으면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고 만다. 자신의 삶이 곧 하나의 화두이다. 그래서 자신을 깨치는 것은 곧 화두를 깨치는 것이다. 화두를 깨친다는 것은 수행과 깨침의 관계에서 매개체로서 수단과 도구적인 기능 내지 깨침의 작용적인 기능을 아울러 말한다. 수단적인 화두의 기능은 예비적인 방편기능이라면 깨침의 작용적인 기능은 본질적인 정기능이 바로 그것이다31]. 말하자면 화두의 수행 내지 화두의 깨침은 혼침과 산란의 제거로부터 깨침의 실현을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곧 대신심의 活現이기도 하다.

 

31] 이것은 공안이 수행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가령 공안수행의 경우 心一境性의 경지가 되어 공안을 참구하는 당사자와 공안 사이에 따로 구별이 없어지는 話頭一念의 경지가 그것이다. 그러나 공안은 그 목적이 처음 산란심과 혼침을 제거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는 공안의 위상까지도 초탈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공안이 수단적인 성격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공부를 하여 도를 깨치려거든 굳은 신심을 지녀야 한다. ?화엄경?에서 말한 ?믿음은 깨침의 근본이요, 공덕의 어머니이다[信爲道元功德母]?는 것은 수행과 깨침과이 근본이 신심이라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생사를 해탈하려거든 이와 같은 견고한 신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이처럼 진리를 믿고 우리의 자성을 믿으며 수행하면 성불한다는 인과도리를 믿어야 하는 것은 신심의 도리를 말한 것이다.

 

신심이 갖추어지면 화두를 정하여 지속적으로 밀고 나아가야 한다. 이것저것으로 바꾸면 마치 부싯돌에서 불을 붙이는 같아서 도중에 멈추거나 다른 것으로 바꾸어서는 불이 붙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오늘은 이 화두, 내일은 저 화두 하면서 좋다는 것을 따라 자주 바꾸기도 한다. 오로지 한 우물을 파야 한다. 이것이 곧 대혜 간화선에서 화두를 통한 不退轉의 용맹심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신심이 필요하고 신심은 지속적인 용맹심이 필요하다는 도리이기도 하다.

 

 

 

Ⅳ. 宏智正覺의 ?照禪修行 - 坐禪

 

?照禪에서는 석존의 좌선과 같이 이미 깨침의 입장에서의 수행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깨침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깨침이 성취된 불성임을 믿는 理佛性의 내용 그대로 똑같이 닮아가려는 연습인 行佛性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존의 坐禪을 자신이 직접 경험하면서 坐禪하는 가운데 스스로가 닮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자신을 구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좌선 그대로일 뿐이다. 이것이 곧 깨침에 대한 근본적인 묵조선의 信心이다.

 

이 신심은 좌선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좌선의 모습은 깨침의 모습이다. 좌선은 더 이상 깨침을 위한 수단이나 과정이 아니다. 이것이 묵조선의 修證觀의 특징이기도 하다.32] 곧 묵조선의 좌선은 단순히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의미라기보다는 一切處에 相을 내지 않고 取捨를 버리며 一切行爲의 行住坐臥에 있어서 直心을 지니고 나아가는 마음의 자세에 중점을 두고 있다. 如法한 수행의 자세를 좌선이라 보고 있는 것이다.

 

32]여기에서 修證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그 차이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修證觀의 차이는 修證(修?)이라는 양측의 이해로부터 그 차이점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간화선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修의 의미는 깨침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곧 화두참구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이것을 熏修 내지 增上의 修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묵조선에서 말하는 修의 의미는 이미 깨침이 완성되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本修 내지 妙修라 한다 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熏修를 통한 證과 本修의 내용으로서의 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깨침이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입장으로서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깨침이지만 아직 熏修를 거치지 않은 깨침이라서 미완성의 證이다. 곧 가능태로서의 깨침을 이치적으로 설정해 놓은 깨침이란 의미에서 因證이라 한다. 둘째는 깨침이 본래부터 現成되어 있다는 입장으로서 첫째와 마찬가지로 깨침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입장은 같지만 그것이 목전에 · 지금 · 이렇게 현성되어 있는 證이다. 곧 활용태로서의 깨침이 이미 현성되어 있는 깨침이라는 의미에서 本證 혹은 現證이라 한다. 修證의 정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大覺思想? 제2집 (대각사상연구원, 1999년)의 졸고, ?宏智正覺의 修?觀? 참조.

 

 

이것은 필수적으로 몸의 자세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행의 태도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묵조선의 좌선은 앉아 있는 그 자체가 現成公案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묵묵히 앉아 자신의 本具佛性을 자각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곧 威儀卽佛法으로 통한다. 따라서 宏智의 묵조는 本證의 自覺이라는 마음의 내용으로서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照의 ?은 本證의 本이고 照는 本證의 證이다. 이것이 곧 ?수행과 증득이 없지는 않으나 다만 염오되지 않을 뿐이다?33] 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지니고 있는 本證 그대로가 묵조라 할 수는 없다. 묵조가 묵과 조로서의 本證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바로 좌선이라는 행위를 필요로 한다.

 

33] ?宏智錄? 卷9, (大正藏48, p.119上) “修證不無 汚染不得” 이 말은 ?宗寶本壇經? (大正藏48, p.357中), “修證卽不無 汚染卽不得”에서 慧能과 懷讓의 대화를 그대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묵묵하여 자재롭고 여여하여 반연을 떠나 있어서 훤칠하게 분명하여 티끌이 없고 그대로가 깨침의 드러남이다. 본래부터 깨침에 닿아 있는 것으로서 새로이 오늘에야 나타난 것은 아니다. 깨침은 광대겁 이전부터 있어서 확연하여 어둡지 않고 신령스레 우뚝 드러나 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부득불 수행을 말미암지 않으면 안된다."34]

34] ?宏智錄? (大正藏48, p.74中), “??自在 如如離緣 豁明無塵 直下透脫 元來到箇處 不是今日新有底 從舊家廣大劫前 歷歷不昏 靈靈獨輝 雖?恁? 不得不爲”

 

여기에서 묵조가 단순한 ?과 照가 아니라 묵묵히 앉아 마음은 텅 비고, 묘하게 전하여 道가 존귀하게 되고, 깊이 침묵하여 밝게 드러나고, 고요히 있어 묘한 존재로 나타난다는 의미의 ?과 照이다. 그래서 ?은 本證의 體로서의 ?이어야 하고 照는 本證의 用으로서의 照여야 한다. 이러한 묵조가 전제된 좌선은 바로 是非를 떠나고 離微를 체득한다. 그 묵조는 곧 妙用으로 나타나지만 有가 아니고 空으로 숨어 있지만 無가 아닌 원리이다. 굉지는 이러한 現成公案의 의미를 간혹 見成公案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공안의 현현이라는 범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묵조선에서는 마음의 수행 못지않게 몸의 수행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定慧觀에 있어서도 定과 慧가 동시에 나타나 있다. 곧 앉아 있는 그 자체를 깨침의 완성으로 보기 때문에 定이 慧의 형식이 아니라 慧의 내용이고 慧는 定의 내용이 아니라 定의 妙用이라할 수 있다.35] 그래서 묵조선의 信心은 앞서 언급했던 達磨의 深信에 통한다. 그리고 좌선수행은 달마의 벽관수행으로 통한다.

 

35] 이 점에서 정과 혜는 다르지 않다. 곧 정은 수행의 측면으로 제시된 개념이라면 혜는 깨침의 측면으로 제시된 개념이다. 나아가서 정은 혜가 바탕이 된 수행이라야만 본래의 정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정은 오후수행으로서의 정이다. 그리고 혜는 정이 완성된 상태의 혜라야만 본래의 혜가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혜는 즉금에 실천되고 있는 지혜로서 교화행위이다. 따라서 정은 지혜의 작용이고 혜는 정의 실천이다.

 

 

이와 같은 좌선의 입장에서는 달리 의지할 하나의 가르침[一乘]도 없고, 달리 닦을 萬行도 없으며, 달리 벗어날 三界도 없고, 달리 알아야 할 萬法도 없다. 그러니 만약 道가 三界를 벗어난 즉 삼계가 없어지고, 道가 삼계에 있으면 삼계에 걸림이 되며, 만약 만법 깨치기를 기다리면 만법은 紛然할 것이고, 만법을 굴리기를 기다리면 만법이 소란스러울 것이다.

 

이여기서 바야흐로 ?照의 八不이 등장한다. 곧 벗어나려고도 않고[不出], 남아 있으려고도 않으며[不在], 없어지지도 않고[不壞], 걸림도 없으며[不?], 굴리려고도 않고[不轉], 알려고도 않으며[不了], 분연도 없고[不紛], 소란스러움도 없다[不擾].36] 그래서 문득 확연히 드러난 몸을 보게 된다. 그 몸은 소리와 색깔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잠을 자며, 소리와 색깔에서도 앉고 누우면서 모든 상대적인 것들을 끊어버린다. 그리고 항상 광명이 현전하여 깨침을 열어 알음알이의 경계를 초탈한다. 이처럼 될 때 비로소 信心은 원래 닦아서 지닐 것이 없고, 일찍이 染汚된 적이 없어서, 무량겁동안 本來具足되어 圓陀陀地한 모습으로서 일찍이 털끝만치도 모자람이 없고, 일찍이 털끝만치도 남음이 없음을 믿게 된다.

 

36] ?宏智錄? 卷1, (大正藏48, p.17下), “到此直須 不出不在不壞不?不轉不了不紛不擾”

 

 

그리하여 묵조에서의 깨침은 필연적으로 좌선의 수행인데 그것은 信心 곧 深信을 수반한다. ?照를 참구한다는 것은 참학자가 無分別智인 깨침의 자각을 통하여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행위이다. 이것이 곧 자기에 대한 자각으로서 깨침이다. 그렇다면 범부의 경우 어떻게 해야만 初心으로부터 심원한 깨침의 세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런 점에서 묵조의 참구는 바로 범부가 제불과 同體라는 것을 표방하는 것이다.37]

이에 대하여 굉지는 無分別智를 지탱하고 있는 입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37]여기에서 범부의 개념은 천친의 설명을 빌리자면 聖體衆生이고 凡夫菩薩이다. 이미 발심을 통하여 보살행에 진입해 있는 범부이고 보살행을 통하여 구비되어 있는 성체를 실현하고 있는 대승범부이다. 天親, ?金剛般若論? 卷下, (大正藏25, p.793中),

“무슨 까닭에 ‘수보리야, 그들은 衆生도 아니고 不衆生도 아니다’라고 말했는가. 그래서 게송에서는 ‘(그들) 非衆生과 衆生이란 聖人도 아니며 非聖人도 아니다’고 말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약 이 경전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중생이 아니다[非衆生]. ?중생이 아니다[非衆生]?라는 것은 聖體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聖體가 없지 않다는 것은 범부의 體가 아니기 때문이다. ?不衆生이 아니다[非不衆生]?라는 것은 聖體가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범부중생도 아니고 聖體衆生 아님도 없다. 그래서 저 경문에서는 ‘왜냐하면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는 것은 여래가 중생이 아닌 것을 이름하여 중생이라 한다고 설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여래가 설한 중생이 아니다[非衆生]는 것은 범부중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중생 중생이라 설한다. 곧 聖人衆生이기 때문에 중생이 아니다[非衆生]고 설하는 것이다.

何故言須菩提非衆生非不衆生者 偈言 非衆生衆生 非聖非不聖故 此以何義 若有信此經 彼人非衆生 非衆生者 非無聖體 非無聖體者 非凡夫體故 非不衆生者 以有聖體故 彼人非凡夫衆生 非不是聖體衆生 如經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故 如來說非衆生者 非凡夫衆生 是故說衆生衆生 以聖人衆生是故說非衆生”

 

 

"우리 출가수행자의 본분사에는 원래 실 한 오라기의 부족함도 없고 벗어남도 없다. 그래서 근본으로부터 텅 비고 확철하다."38]

38]?宏智錄? 卷1, (大正藏48, p.1下), “我納僧家本分事 元無一絹頭缺少 無一絹頭分外 從本已來 虛明廓徹”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佛心이 本具되어 있음을 전제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범부가 바로 이 佛心의 本具性을 모르고 밖의 경계에 대한 취사분별에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깨침의 本源을 좌선을 통하여 원만하게 드러내 가는 과정이 바로 초심으로부터 닦아가는 수행과정이 된다. 각자 그 수행을 통해서 깨침으로서의 佛을 닮아가는 행위가 참구이다. 따라서 묵조에서의 무분별의 참구는 외부로 치달리는 마음을 멈추고 本具한 자기의 본래성으로 되돌아가 자각하는 것이다. 그 本具性의 자각을 체득한 것으로부터 소위 깨침으로서의 묵조의 참구가 시작된다. 따라서 묵조라는 무분별지의 참구는 諸佛과 同體라는 知見을 터득해 나아가는 것으로서 자기에게 본래부터 구비되어 있는 무분별지를 자기자신에게서 현현시키는 것이다. 그 현현이란 일체를 放下하여 本具한 佛心의 虛明을 不昧케 하는 참구의 행위이다. 그래서 묵조의 참구에 있어서는 깨침의 당체인 本具의 無分別智를 그 본래의 무분별에 따르게 하고 그와 같이 존재케 하는 태도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특히 주목해야 될 것은 어디까지나 굉지의 자선수행은 ?과 照가 어우러져 있으면서 거기에 떨어지지 않는 자태라는 것이다. 바로 침묵이 곧 설법이고 설법이 곧 침묵이다. 그래서 그의 이러한 내면의 심리는 고요하여 신령스럽고 묵묵하여 참된 공부로써 마음을 일구어가는 本證 그대로이다.

 

묵조의 입장은 그 근저에 佛心의 本具라는 신심을 기본적으로 두고 있다. 때문에 그것이 자기에게 있어서는 불심의 본구성과 무분별지 있어서 묵조의 참구 그 자체가 無媒介的?非間隔的?非時間的인 것으로서 자기에 대한 현재?여기?자신이라는 사실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불심의 본구성에로의 회귀와 그 현현을 통한 자각적인 受用은 단순한 寂靜退?과는 엄밀하게 구별된다.39]

 

39]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은 곧 話頭없이 바로 그 당체를 威音那畔의 일과 空劫已前의 마음자리로 대신하여 無事寂靜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 때문이다. 항상 어디서나 一行三昧와 一相三昧로 일관해야 할 치열한 구도심을 접어둔 채 현실을 무시한 안이한 모습의 부정이었다.

대혜는 이러한 것을 가리켜 아무것도 모르는 흑산귀굴의 귀신들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묵묵히 좌선하는 그 자체를 망상에 빠져 있는 모습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대혜는 ?答李郞中?에서 “가장 하열한 무리는 ?照無言과 空空寂寂으로 귀신굴에 빠져 있으면서 그 곳에서 구경의 안락을 구하는 것이다.” ?大慧語錄? 卷29, (大正藏47, p.935上-中)라고 말하여 몇몇 邪師들에 대하여 공격을 가하고 있다. 이 중에는 그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총명하고 지견이 많은 것을 경계하는 말로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삿된 견해의 으뜸을 견문각지를 알아서 자기를 삼고 現量境界로써 심지법문을 삼는 자들이라 하여 오히려 분별망상을 특히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삿된 무리들이 사대부에게 마음을 거두고 고요히 앉아 일마다 관여치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찌 분별심을 가지고 마음을 그치게 하며, 분별심을 가지고 마음을 쉬게하며, 분별심을 가지고 마음을 활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한다면 어찌 외도와 이승의 禪寂 斷見의 경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어찌 자기 마음의 밝고 묘한 작용과 구경안락과 여실히 청정한 해탈 변화의 묘를 나타내겠습니까.” ?答陳少卿? 첫째 편지, (?大慧語錄? 卷26, 大正藏47, p.923中)

이 경우 대혜의 지적은 본래 법에는 취사선택의 분별이 없건만 집착해야 할 어떤 건덕지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습에 대한 것이었다.

 

 

묵조선에서는 이와 같이 깨침의 分上에서 좌선을 통한 心과 信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깨침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깨침이란 불성의 성취임을 믿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존의 좌선을 자신이 그대로 흉내내면서 좌선하는 가운데 스스로가 깨쳐 있음을 자각하고 그것을 좌선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나아가서 좌선을 통하여 깨침이 저절로 드러난다.

 

 

" 항상 광명이 현전하여 깨침을 열어 알음알이의 경계를 초탈한다.

이처럼 될 때 비로소 信은 원래 닦아서 유지할 것이 없고, 일찍이 染汚된 적이 없어서,

무량겁동안 本來具足되어 고 圓陀陀地하여,

일찍이 털끝만치도 모자람이 없고, 일찍이 털끝만치도 남음이 없음을 믿게 된다." 40]

40]?宏智錄? 卷1, (大正藏48, p.17中-下),

“常光現前 開發覺華 超脫情境

始信元不修持 不曾染汚

無量劫中 本來具足 圓陀陀地

曾無一毫頭許欠少 曾無一毫頭許盈餘”

 

 

이처럼 만약 본래의 것[正位]에 대한 深信은 心心?念念?法法?塵塵이 다 正位로부터 건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의 心이 다 진리의 心이고, 일체의 법이 다 진리의 법이다. 따라서 法 곧 本證自覺과 信心 곧 深信은 서로가 不一不二의 관계로서 구족되어 있다. 그리하여 果가 충만하여 보리가 원만해지고 꽃이 피며 세계가 일어나는 것이다. 곧 果가 圓滿하다[果滿]는 것은 正位에 들어간 도리로서 諸佛諸祖가 증득한 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꽃이 핀다는 것은 正位로서의 果가 철두철미하게 원만해지면 시방세계에 應物顯現하여 온 천지를 두루 뒤덮게 되는 것을 말한다.41] 이처럼 묵조선의 信心은 深의 信이고 自覺의 心으로서 信과 心이 동일시되는 입장이다.

 

41]이와 같은 ?照의 종지를 나타내주는 말이 虛而靈하고 空而妙이다. 그러나 虛가 단순한 虛談寂照의 것이 아니고 靈도 正位가 寂?한 것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空으로서의 虛이고 妙로서의 靈이다.

 

 

Ⅴ. 맺는 말

 

신심은 발심의 근원이다. 나아가서 모든 보살행의 시작이다. 그래서 수행과 깨침을 위한 기초이면서 궁극적으로는 보살행의 완성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서두에서 언급한 바 있는 수보리의 질문에 ?세존이시여, 보살은 대승에서 어떻게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해야 하고 마땅히 어떻게 住하며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42] 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을 선수행의 측면으로 보자면 신심은 발심과 수행과 깨침과 교화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것은 보리달마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벽관수행으로 드러났던 것인데 곧 경전의 가르침을 통한 深信이었다. 그것은 중생과 성인이 동일한 청정심을 구비하고 있다는 대명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혜의 간화선의 신심은 화두를 통한 不退轉의 용맹심으로 나아가기 위한 바탕이요 지속적인 용맹심의 유지이다. 그것이 화두참구라는 행위로 드러났다. 또한 굉지의 묵조선의 신심은 좌선을 통한 深의 완성으로서의 信이고 本證이 自覺된 心으로서 信과 心이 동일시되는 입장이다.

 

이처럼 祖師禪에서의 수행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되고 전개되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신심을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행위가 각각 보리달마에게서는 壁觀의 深信으로 나타났고, 대혜종고의 간화선에서는 大信根?大疑團?大憤志라는 화두참구의 모습으로 전개되었으며, 굉지정각의 묵조선에서는 本證自覺이라는 本來信을 바탕으로 하여 只管打坐의 좌선수행으로 성취되었다.

 

42] 天親, ?金剛般若論? 卷上, (大正藏25, p.781下) “世尊 云何菩薩大乘中發阿?多羅三?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修行 云何降伏其心”

 

 

 

[ 국문초록 ]

 

발심의 본질은 신심이다. 이것은 모든 보살행의 시작이다. 그래서 신심은 수행과 깨침의 기초이면서 궁극적으로는 보살행의 완성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보리유지 번역본 금강경의 서두에서는 수보리가 ?세존이시여, 보살은 대승에서 어떻게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해야 하고 마땅히 어떻게 住하며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라고 묻는 내용이 있다.

 

이것을 선수행의 측면으로 보자면 신심은 발심과 수행과 깨침과 교화의 근본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보리달마는 벽관수행으로 드러냈다. 곧 경전의 가르침을 통한 深信이었다. 그것은 중생과 성인이 동일한 청정심을 구비하고 있다는 대명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혜의 간화선에서의 신심은 화두를 통한 不退轉의 勇猛心으로 나아가기 위한 바탕이요 지속적인 용맹심의 유지이다. 그것이 화두참구라는 행위로 드러났다. 또한 굉지의 묵조선의 신심은 좌선을 통한 深의 완성으로서의 信이고 本證이 自覺된 心으로서 信과 心이 동일시되는 입장이다.

 

이처럼 祖師禪에서의 신심에 바탕한 수행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되고 전개되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신심을 바탕으로 한 지속적인 행위가 각각 보리달마의 壁觀의 深信이었다. 대혜종고의 간화선에서는 大信根?大疑團?大憤志라는 화두참구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굉지정각의 묵조선에서는 本證自覺이라는 本來信을 바탕으로 하여 只管打坐의 좌선수행으로 성취되었다. 때문에 신심은 청정심이다. 그 청정심이 深信에 근거하여 현현하고 작용할 때가 그대로 수행이고 깨침이다.

 

 

[ 주제어 ]

발심, 信心, 벽관, 深信, 간화선, 화두, 묵조선, 본증자각, 조사선, 대신근, 대의단, 대분지, 지관타좌

 

 

 

[ Abstract ]

 

Relation of the view practice-enlightenment & Devotion in Patriarchs-seon

 

Kim, Ho-gui

 

(Research Professor at Dongguk Buddhist Research Institute)

 

The practice in Patriarchs-seon originate devotion about self-nature. So devotion of self-nature means enlightenment of self-nature. Furthermore, devotion is the foundation of education all beings.

First, the most classical form is deep-faiths of Boddhidharma. The term of Patriarchs-seon originate Boddhidharma's seon-buddhism transmitted by Hui-neng, the six patriarch in China. Deep-faiths is proposition of all beings & all buddhas which posses essentially the same pure mind.

Second, Ta-hui Tsung-kao(1089-1163) emphasis devotion. Eespecially, Ta-hui Tsung-kao exhorted about the subject of Wu.

Third, Hung-chieh Cheng-choai(1091-1157) emphasis self-awakening of the original realization, the un-thought and the solely for sitting-poster, So called of silent-penetration seon. Realization of the silent - penetrative seon comes when each principles faces the same position. In that manner, the practice structure of the silent - penetration seon tells us the self - consciousness of essentially realization and, the priority is directly focused on the world of being spiritually awakened, namely, the world of Buddha. Because it is the self - consciousness of essentially realization, there are no distinction between the way to lead for realization and self - discipline. The methods are sitting-poster, self awakening of the original realization and un-thought.

Patriarchs-seon, practice, devotion, self-nature, enlightenment, deep-faiths, Boddhidharma, pure mind, Ta-hui Tsung-kao, Hung-chieh Cheng-choai, silent-penetration seon. Realization of the silent - penetrative seon, self - consciousness of essentially realization, sitting-poster, self awakening of the original realization, un-thought.

 

[ Key words ]

Patriarchs-seon, practice, devotion, self-nature, enlightenment, deep-faiths, Boddhidharma, pure mind, Ta-hui Tsung-kao, Hung-chieh Cheng-choai, silent-penetration seon. Realization of the silent - penetrative seon, self - consciousness of essentially realization, sitting-poster, self awakening of the original realization, un-thought.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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