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기 복(福)에 산다
부처님이 왕사성의 영취산에서 설법하고 계실 때이다. 나라에는
임금의 외딸인 선광(善光)이라는 17∼8세의 미혼의 공주가 있었다.
그녀는 몸에 금빛 서기가 감돌았고, 총명하고 미인이어서 부왕과
왕비가 무척 귀여워하고, 궁중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도 한결같이
공주를 사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느날 왕은 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너는 나의 힘과 복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한테 존경과 사랑을
받는구나.”
그러나 공주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아바마마의 은덕이 한량없습니다만, 알고 보면
아바마마의 힘을 입어서가 아니옵니다. 아바마마의 덕택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제가 전생에 지은 복이 있기 때문이옵니다.”
왕은 공주의 대답을 듣고는 못내 섭섭하여 벌컥 화를 내고 말했다.
“네 말이 그러하다면, 너한테 그럴만한 복이 있는지를 어디
시험해보자!”
하고 당장 좌우의 시종들에게 엄명했다.
“여봐라, 당장, 이 성안에서 가장 헐벗고 굶주린 미혼의 거지
사내를 한 명 데려오너라.”
성난 왕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시종들은 가장 가난한 거지 사내
한 명을 데려왔다. 왕은 공주를 불러 거지 앞에 세우고, 거지에게
아내를 삼으라고 명령하면서 공주에게 말했다.
“너는 지금까지의 행복이 부모의 은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네 스스로의 복이라고 주장하니 너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절실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나는 네가 주장하는 복업에 대해 장차
지켜볼 것이다. 너는 당장 거지와 함께 왕궁을 떠나라! ”
부왕의 처사는 청천벽력으로서 야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였지만
선광공주는 조금도 부왕을 원망하지 않았고, 자신의 주장을 후회하지
않았다. 슬피 우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함께 울던 선광공주는 마침내
거지를 따라 왕궁을 떠났다. 거지는 산밑에서 거적데기로 만든
움막집에서 혼자 외롭게 살고 있었다.
선광공주는 움막 속에 들어가 거지인 남편에게 정중히 아내로서
인사를 드리고 물었다.
“ 저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제가 세 치 혀를 잘 못 놀려서
그 재앙으로 왕궁에서 쫓겨나고 거지를 남편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비웃을 것입니다만, 저는 그 사람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현생의 모든
행(幸)·불행(不幸)은 모두 전생에서 지은 업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부의 인연을 맺은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두 전생의 인연이지요. 현세에서의 불행에 대해 슬퍼할
것도 아닙니다. 모두 전생에 지은 업보로써 마치 태양을 흑운이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업보의 흑운을, 선행을 통해 제거할 수 있다면 청천의 태양을 바라볼
수 있지 않겠어요? 이제 우리는 부부일신이 되었으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를 믿고, 선행을 통해 복을 지어 나가는데 게을리
하지 않기를 맹세해 주세요. 그런데, 당신에게는 부모님이 계신가요? ”
거지 신랑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우리 집은 조상 대대로 나라에서 손꼽히는 큰 부자였답니다.
그런데 아버지 대에서부터 집안이 몰락의 길로 들어서 가난한 신분이
되었답니다. 저는 외아들이었는데, 어렸을 때 양친이 급살로 일찍
돌아가셨어요. 저는 천지에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 거지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선광공주는 남편을 동정하면서 다시 말했다.
"전생에 가난한 사람들과 수행자들에게 보시를 한 공덕으로 부자가
되는 것인데, 아버지 대에 와서는 보시공덕을 지으시지 않은 것
같군요. 그러면 당신은 부모님과 함께 살던 예전의 집터를
아시는가요? ”
“그 터야 알고말고요. 담장도 허물어졌고, 쑥대밭으로 변해버렸는
걸요. 왜 집터를 묻는 겁니까?”
“생각이 있어서예요. 아무것도 묻지 마시고 저를 서방님의 집터로
안내해주세요.”
졸지에 거지의 아내가 된 선광공주는 남편을 따라가 예 집터에
이르자 혼자 사방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이윽고 선광공주는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거지신랑은 이해할 수 없어 멀건이
이상한 짓을 하는 아내를 바라만 볼뿐이었다.
선광공주는 땅속 깊은 곳에서 궤짝을 찾아 내었다. 보물을 가득 담은
궤짝이었다. 놀란 눈으로 묻는 거지 신랑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보시를 하지 않았던 시부모님은 보물을 집터의 땅속에 숨겼으리라고
생각했지요.
세상의 어느 부모이든 자식을 위해 재산을 어떤 방법으로든 남겨놓는
곳이니까요. 시부모님은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셔서 당신에게 유언할
기회가 없었을 거예요. 이제 당신은 걸식을 하지 않아도 저와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어요.”
선광공주는 보물의 일부를 팔아 옛집의 터에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며 호화롭게 살게 되었다.
왕은 딸의 당돌한 태도에 너무도 괘씸하여 홧김에 거지에게 딸려
보냈으나, 날이 갈수록 자기의 처사가 가혹했음을 후회하며 아픈
마음을 참고 있었다. 왕은 견디다 못해 어느날 시종에게 말했다.
“ 내 딸 선광이 그동안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구나. 비밀히 소식을
알아오너라.” 소식을 알아온 시종이 이뢰었다. “대왕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선광공주는 놀라웁게도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수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예전의 왕궁생활과 다름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왕은 시종의 보고를 듣고 믿을 수 없어 밤에 몰래 선광공주의 집을
살펴보았다. 과연 공주는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왕은 눈시울을
적시며 감탄하면서 이렇게 독백했다.
“과연 부처님의 말씀에는 거짓이 없구나. 일체중생이 제 스스로
선악을 지어 그 보응을 받는다는 말씀은 만고의 진리이지 않는가.”
선광공주는 무엇보다 거지남편에게 학문과 예법을 익히게 했다.
어느날 선광공주는 남편에게 비단옷을 입혀 호화로운 수레에 태우고,
수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게 하여 왕궁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도록
하고, 부모님을 정중히 초청하도록 했다. 딸의 따뜻한 배려에 부왕과
왕비는 감탄하고 사위를 따라 딸의 집을 방문하니 과연 딸은 예전의
궁궐생활과 같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딸은 부모님을 상면하자 울면서 반가워했다. 부왕은 딸에게 아비의
잘못을 사과했다. 왕은 부처님을 찾아가 절하고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의 딸 선광은 전생에 무슨 복덕을 지었기에
왕가에 태어났으며, 또 거지를 따라 나서고도 행복할 수 있는 가요? ”
부처님은 잠시 선정에 들어 선광의 전생을 살피시고는 선정에서
깨어 말씀하셨다.
“과거세에 비바시불(佛)이 계실 때 나라에 ‘반두’라는 왕비가
있었지요. 왕비는 인물이 빼어나고, 총명하며 불심이 깊어 보시하기를
좋아했지요. 나라의 거지들이 모두 왕비를 찬양했답니다. 비바시불이
열반에 드신 뒤, 무수한 오색사리가 나타났답니다.
그 왕비는 대탑(大塔)을 세워 비바시불의 사리를 봉안하여 공양하면서
자신은 물론 중생의 복전으로 만들었답니다. 그리고, 비바시불의
동상을 조성하고 나서 이렇게 발원했답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이 다음 세상에 제가 인도환생 하였을 때는
제 몸에서는 금빛 광명이 나고, 부귀를 누리면서 삼도(三途)와 팔난
(八難)을 만나지 않게 하시며, 일체중생에게 보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부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왕이시여, 그 때의 왕비가 바로 오늘의 선광공주입니다. 그리고
거지 사위는 전생에도 선광공주의 남편이었습니다. 전생에 아내가
수행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할 때, 남편은 보시하는 것을
싫어하여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아내의 보시공덕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마음을
고쳤습니다. 그러한 인연으로 금생에 남편은 거지 몸을 받았다가
선광공주를 만나 부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선광공주가 떠나면
남편은 다시 가난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선악의 업(業)은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니 인과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
선광공주의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하여 음미해 볼만한 교훈적 이야기다
복전에 씨앗을 심지는 않고, 복이 저절로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며
마음 고생하며 죽어가는 중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전생이라는 것은
아득한 일이 아니다. 일초전도 전생사이다. 내일을 위해서는 오늘,
아니 일초전이라도 복전에 씨앗을 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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