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철학/동양철학

금 극 목

곰선생=태화 2015. 3. 31. 15:50

금이 목을 극하는 이치는 물이 불을 극하는 이치만큼이나 명확해보인다. 나무는 도끼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천년을 자라온 우람한 巨木도 도끼 한자루면 쓰러지고 만다. 그러니 금극목에 대한 이치는 더이상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실은 이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에서 잠시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면 모순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과히 어렵지 않다. 무슨 소린가 하면, 도끼가 가만 놔둬도 저절로 나무에게 달려들어서 찍어버리느냐고 묻는다면 일순간에 대답이 궁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렇게 타성에 젖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뭔가 생동감이 있고, 이치에 합당한 사고방식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금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이미 초로(初老)의 인생이다. 그래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시달리고 남을 부려보기도 하고 모든 것을 겪어본 나머지이다. 그러니 어린 친구들이 천방지축으로 동분서주하고 좌충우돌하는 것을 보면서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요즘애들은 어떻다고 말하는 세대는 아마도 금에 해당하는 연령층에서 가장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기만 하면 잔소리다. 물론 ‘니네들 잘되라고 하는 소리’라는 말을 꼭꼭 집어 넣는다. 그렇게 잔소리를 하니까 목에 해당하는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잔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그래도 하늘 같은 어른들이니 감히 대들 수가 없다. 말인즉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위로하기를 ‘세대 차이’라고 얼버무린다. 그렇지만 사실 살아보노라면 세대차이랄 것도 없는 것이 인생살이다. 천년 전에 저술된 종교서적에서도 ‘지금 사람들은 성실하지 못하다’고 푸념을 한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말을 반드시 첨가하는데, 그 말이 천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래도 재연이 되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오백년 전에도 마찬가지이고 요즈음에 나온 책들도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이치는 결국 항상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만약에 천년동안 버릇없음이 계속 이어졌다면 지금쯤은 도덕적이라는 말은 이미 사전에서 조차 없어졌어야 옳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도덕적인 사람과 부도덕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인간살이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이렇게 금의 잔소리를 들어가면서 자란 청소년은 그래도 스스로 훨씬 단단한 성장을 하게 된다. 전혀 잔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란 온실의 화초와는 그 기준을 달리한다. 어디에 내어놔도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우수한 나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 나누는 金剋木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된다.




상극의 이치로써 이와 같이 설명을 해보지만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렇게 극을 하게된 이유보다는 극을 하는 원칙을 이해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게 극을 하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 길게 설명을 할 뿐이다. 항상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하는것이 학문을 이해하는데 지름길이 될것으로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