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면으로 들여다본 정신질환자의 내면
다중인격 장애와 빙의(귀신들림, 신내림, 무병)현상만큼 정신과 의사나 일반인 모두로부터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질병도 없다. “그런 병이 어디 있어?”“요즘같은 시대에 귀신들림 이라니?”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한국의 난치성 정신질환자중 상당수가 이런 병을 앓고 있으며, 이 두병의 실체가 최초로 임상연구 결과 밝혀졌다.
김영우 의학박사·김영우신경정신과 원장
병 병원에서 아무리 열심히 치료해도 잘 낫지 않는 정신·신체질환자 중 많은 수가 다중인격장애와 빙의 현상이라는 두 가지 질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 최면에 의한 임상치료 결과 밝혀졌다. 상호 비슷한 점이 많아 혼동하기가 쉬운 다중인격장애와 빙의 현상에 대한 의학적 이해를 돕기 위해 그 배경과 간단한 이론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처럼 끔찍한 범죄나 공포를 소재로 한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으로 몇 년 전부터 자주 등장해온 다중인격 장애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이제 낯설지 않다. 영화 속에서 다중인격 장애자들은 항상 범죄와 악행을 일삼는 것처럼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지며 그들을 추적하거나 치료하는 경찰관과 정신과 의사들도 상식 밖의 말과 행동을 자주 하고 있어, 최근 일부 미국 정신의학자들이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들에게 시정을 요구한 일까지도 있었다.
사실이야 어떻든 영화 속에 그려지는 다중인격자들의 복잡하고 기이한 언행과 갖가지 범죄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널리 알려진 다중인격장애에 대해 전문가들인 정신과 의사들조차 각기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다중인격장애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정신질환의 두 분류체계에서 ‘다중인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 또는 ‘해리성 인격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라는 용어로 분류돼 있어 정신질환의 한 파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병 자체가 아예 없다고 주장하는 의사에서부터 복잡하고 잘 낫지 않는 환자 대부분이 다중인격장애자라고 말하는 의사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분분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수련과정에 다중인격에 대해 배우거나 다중인격이란 진단명을 써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막상 다중인격장애 환자를 만나도 다른 정신질환으로 진단하여 치료하기 일쑤다. 또 의사들이 정신의학 발달사에서 다중인격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대해 문헌들을 잘 살펴보지 않은 것도 원인이 될 수 있다.
필자는 여러 해 동안 일반적인 정신치료나 약물치료로 잘 낫지 않는 환자들에 대해 다양한 최면치료 기법을 개발하여 그 발병 원인을 추적하고 치료해왔다. 그 과정에 여러 형태의 다중인격장애 환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환자들은 이미 다른 정신과 병원에서 정신분열증이나 성격장애·만성우울증·공포증 등이라 진단받고 여러 해 동안 약을 먹고 정신치료를 받았어도 낫지 않는 상태였다. 또 한방치료와 기(氣) 치료, 안수기도와 천도식, 굿 등 민간에 알려진 모든 방법을 동원해봐도 소용이 없었던 환자들이다. 그런데 일단 다중인격이 문제의 중심이라는 것을 밝혀낸 다음에는 단기간에 적절한 최면치료만으로도 대부분의 환자들이 스스로 만족할 만큼 회복돼 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환자들의 임상사례를 중심으로 이 병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참고로 여기서 소개하는 여러 증례들은 모두 필자가 주도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들의 최면치료 연구모임인 ‘한국임상최면학회’의 사례 발표시간에 논의되었던 실제 치료기록들이다. 이 모임에서는 주로 다중인격장애와 빙의 환자들의 최면치료 사례를 분석하고 토론하여 더 효과적인 치료기법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과거의 나를 찾아서
30세의 미혼 직장여성인 이정숙씨는 중학교 시절부터 우울증을 앓아왔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갈수록 대인관계에서의 불안감과 충동적 행동이 점점 심해져 정신과 병원을 찾아 치료를 시작했다. 약을 먹고 상담을 하면서 증상이 조금 호전되기는 했지만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우울과 불안 증상은 없어지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교 상담실과 대학병원 정신과를 오가며 정신분석적 면담치료를 4년간 받았다고 했다. 1~2주에 한 번씩 50분 정도 면담치료를 했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고 자기 증상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씨 치료를 맡았던 정신과 의사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의 관계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진단했지만, 환자로서는 별로 수긍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가 성격 차이로 심하게 다툰 적이 많아 불안한 적이 있었지만 부모와 환자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이처럼 환자의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는 병의 원인을 일반적인 정신과 면담으로 밝혀내기는 무척 어렵다.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자하여 정신분석적인 치료를 받는다 해도 환자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병의 원인까지 밝혀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환자는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원인을 찾는 최면치료를 통해 병을 치료하기 원했다. 최면상태에서 필자는 환자를, 우울증의 원인이 된 어린 시절의 어느 시점으로 자유롭게 ‘연령 퇴행(최면을 통해 환자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내는 요법)’시켰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김영우(이하 김):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정숙(이하 이):…(울먹이기 시작함)
김:거기가 어딘가요?…편안하게 살펴보세요…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이:(작은 소리로 울음을 삼키며) 엄마와 아빠가 싸우고 있어요…안방에서요…저는 옆방에서 떨고 있어요….
김:자신이 몇 살인지…그리고 뭘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말해보세요.
이:…저는 다섯 살이에요…너무 무서워요…엄마가 비명을 지르고…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요….
김:그런 일이 자주 있었나요?
이:네…거의 매일 그랬어요…저와 동생들은 아버지가 저녁에 집에 들어오시면 언제나 불안했어요…(심하게 울먹이기 시작함).
이런 식으로 환자가 어린 시절의 괴로웠던 기억들을 차례로 찾아 재경험하며 내면에 쌓여 있던 당시의 감정을 배출시키는 것은 증상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 최면은 평소에 기억하지 못하던 충격적인 기억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늘 기억하고 있던 일들도 최면 상태에서 다시 떠올릴 경우 그때의 괴롭고 강렬했던 감정들을 함께 해소시켜 준다. 또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증상들이 과거의 경험들과 어떻게 연관돼 있는가 하는 점을 환자 스스로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정신치료보다 빠르고 강한 치료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나 속의 또다른 존재
이 환자도 첫 시간에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하던 느낌들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다음 시간에 필자는 환자의 다중인격장애 여부를 진단하는 최면과정에, 환자의 입을 통해 자신이 10세라고 주장하는 ‘정희’라는 여자애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작은 소리로) 제 머릿속에 누가 있어요…어린아이 같은데…저를 보고 치료를 받지 말라고 해요….
김:그게 누구죠?…안에 있는 그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세요…이름이 뭔가요?
이:(목소리와 표정이 어린이처럼 변하며) 정희요….
김:몇 살이에요?
이:(수줍은 듯) 열 살이요….
김:어디에서 왔어요?
이:몰라요…원래 여기 있었어요.
김:이 사람(환자)에게 오기 전에는 어디 있었어요?
이:몰라요…처음부터 이 사람하고 있었어요…제가 이 사람이에요.
김:그런데 왜 따로 살고 있어요?… 지금은 이 사람이 아닌가요?
이:네…혼자 사는 게 좋아요.
김:왜 혼자 사는 게 좋죠?
이:(우울한 목소리로) 엄마, 아빠가 너무 싸워서요…. 지겹고 무서워요.
다중인격장애는 어린 시절의 정서적인 충격이나 상처가 그 사람의 정상적인 인격의 일부를 마치 파편처럼 떨어져 나오게 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 학자들의 해석이다. 그 충격과 상처를 피해 이렇게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의 인격’은 떨어져 나온 시점의 나이와 성격을 그대로 지닌 채 자기 나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며 충격을 받았던 당시의 감정상태에 언제나 머물러 있게 된다.
이 작은 인격은 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적 충동으로 나타나거나 기분의 변화, 사회성, 음식물이나 사물에 대한 선호와 혐오, 습관 등 여러 가지 신체적·정신적인 면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식으로 일부의 인격이 떨어져 나오는 것을 ‘해리(解離, dissociation) 현상’이라고 부른다.
여하간 어린 시절에 극심하게 신체적·정서적 혹은 성적인 폭행을 당하면 그 결과로 인격의 조각들이 해리돼,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인격이 무의식 속에 형성된다. 그중 하나가 때때로 표면으로 올라와 그 사람 전체를 지배하면, 그 사람은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런 상황을 다중인격장애 혹은 해리성 인격장애라고 부른다.
외국의 한 보고에 따르면 이들 환자의 95~100%가 어린 시절에 근친상간이나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다중인격장애라는 진단은 15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쓰이지 않았지만, 최근들어 어린 시절에 폭행을 당하는 일이 생각보다 흔하고 그 경험이 지속적인 상처와 후유증을 남긴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부터 자주 쓰이고 있다.
이 환자의 경우에도 부모의 잦은 충돌과 갈등 상황이 인격의 한 부분을 해리시켜 ‘정희’라는 이름의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정희는 자신이 분리돼 나온 시점의 괴롭고 우울했던 감정상태에 고정된 채 환자의 무의식 속에 숨어 생활 전반에 악영향을 끼쳐온 것이다.
이 환자의 치료과정을 간단히 압축하자면 정희의 감정적 상처를 치유한 후, 설득하고 달래 원래의 전체 인격 속으로 되돌려보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희가 사라짐과 동시에 정희가 가지고 있던 우울과 무기력, 불안과 유아적이고 충동적인 행위 등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어서 전체 인격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으로 치료를 종결할 수 있었다. 여러 개의 다중인격을 가진 환자의 경우에는 각각의 인격들을 전체와 통합시켜주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한계
사실 한 사람 속에 숨어 있는, 평소와 전혀 다른 인격들이 표면으로 올라와 말하고 행동하는 다중인격 현상은 고대로부터 모든 문화권에서 관찰돼왔고, 흔히 귀신들림이나 빙의(spirit possession)현상이라고 생각돼왔다. 따라서 이런 환자들에 대한 치료는 오랜 세월 신비로운 영적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지던 주술사나 종교인들의 손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각자가 가진 종교 교리나 믿음에 따라 치료법을 개발하여 때로는 치료에 성공하기도 했지만 미신과 무지에 따르는 많은 부작용과 문제점을 피할 수 없었다. 19세기 말까지도 다중인격 현상의 원인과 실체를 분명히 밝히지 못한 채 악령의 장난이나 마술, 신의 저주일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의 안개에 싸여 있었다. 그러다 현대의 심리학 이론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최면치료를 이용하는 정신의학자들은 사람 마음속에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학자들은 최면을 이용한 다중인격의 치료 사례를 많이 발표했고 다중인격과 귀신들림의 정의와 진단기준, 유사점과 차이점 등에 관한 많은 가설과 이론을 내놓았다. 이들은 귀신들림으로 생각돼오던 다중인격과 망상·환청·환시·신비체험 등 원인을 알 수 없는 정신증상들을 모두 심리학 이론으로만 설명하려고 했다.
나중에 정신분석이론을 주장한 프로이트도 이때 최면치료를 통해 무의식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런 관찰과 치료경험은 정신분석이론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최면상태에서 환자들이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반응들에 대한 오해와 부담감 때문에 최면치료를 포기하고 정신분석이론을 만들어내면서 모든 정신 병리와 증상들을 이 이론에 맞추어 설명하려고 하였다. 과학적 분석과 논리적 설명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 자만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정신분석이론은 사실성에 대한 검증 없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정신의학과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환자의 실질적인 증상 호전에 탁월한 효과를 가진 최면치료도, 한층 더 추상적이고 복잡한 이론에 환자를 꿰어맞추는 정신분석치료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최면상태에서 주로 진단되던 다중인격은 그 얼굴을 감추고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이라는 새롭고 모호한 진단명 뒤로 숨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다중인격이라는 진단이 거의 쓰이지 않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실제로 다중인격을 가진 환자들은 엉뚱한 치료를 받게 되면서 난치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다시 최면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그동안 연구가 부족했던 다중인격과 해리 장애에 대한 연구보고가 점차 늘었고 1980년대 말부터는 많은 학자들이 다중인격에 대한 논문과 사례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 이후 다중인격이란 진단명이 점점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사용 빈도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빙의란 무엇인가?
한편 다중인격장애와 비슷한 증상이지만 분명히 다른 질환인 ‘빙의’ 현상이 있다. 빙의란 어떤 알 수 없는 영적(靈的)인 힘이 환자에게 침투하여 삶의 전반이나 특정 증상에 영향을 주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환자들은 흔히 “내 안에 다른 누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나를 조종할 수 없다” “누군가 내 머리속에서 얘기한다”는 등의 증상을 호소한다. 때로는 환각과 악몽에 시달리고, 강박적 망상이나 우울 증상도 자주 나타나며,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초현상이나 초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무당이 신들린 상태도 일시적인 빙의라고 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들은 현재의 진단 기준에 따라 이런 환자들을 모두 뇌기능의 이상으로 인해 생기는 정신분열증의 일종으로 진단하여, 주로 약물로 치료하고 있다. 사실 정신분열증상도 빙의 증상과 흡사하기 때문에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빙의환자들은 정신분열증 치료로 잘 낫지 않아 골치아픈 환자로 취급되기 쉽고, 이들의 묘한 증상과 주장은 정신과 의사들에 의해 무조건 환각이나 망상으로 취급되고 일방적으로 묵살당하기 때문에 환자들의 좌절감은 그만큼 더 깊어진다.
결국 정신과 의사들을 믿지 못하는 환자들은 자기를 낫게 해주겠다는 각종 사이비 종교나 수련단체, 믿을 수 없는 치료자를 찾아가 시간과 돈을 낭비하며 큰 피해를 보기 쉽다. 그렇다면 이들이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대로 귀신이 들렸기 때문일까?
유엔 산하의 국제보건기구(WHO)에서 정한 국제질병 분류에도 ‘빙의’라는 진단명은 정식으로 있지만 빙의의 실체에 대해서는 구명된 것이 없다. 빙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에 대해 기존 심리학계는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갈등이 그런 형태의 상징과 증상으로 왜곡되고 변형되어 나타나는 것일 뿐 귀신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이론만으로는 설명도, 치료도 안 되는 환자가 너무나 많다는 점이 문제다. 이론이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결과가 없다면 그 이론은 무용지물이다. 더구나 영혼이나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방법조차 없는 상황에 ‘그런 것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다중인격장애를 치료하는 과정에 환자의 내면에 숨어 있는 ‘작은 인격’들을 불러내 얘기해보면 자신이 ‘환자에게서 떨어져 나온 일부분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존재’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다중인격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이런 주장은 대개 정당한 이유없이 일방적으로 무시해버린다. ‘외부에서는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다’ 라는 편견과 선입견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환자 속의 또다른 존재가, 환자 내면에서 분리된 다중인격인지 외부에서 들어온 빙의인지를 객관적으로 밝혀 낼 방법이 없다. 그러나 외부에서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다중인격을, 내면에서 떨어져 나온 다중인격과 같은 이론과 치료방법으로 해결하기는 무척 어렵다.
“다중인격 치료는 무척 까다롭고 복잡하여 아무리 능숙한 치료자라도 최소한 2~3년의 치료기간을 필요로 한다”라는 것이 현재 다중인격 치료에 대한 정설이다. 그러나 이런 심리학 이론을 모두 무시하고 환자 내면에서 얘기하는 다중인격의 주장에 따라 치료 방향을 정할 경우 아주 짧은 기간에 극적인 치료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실제 환자의 치료사례를 살펴보자.
외부에서 온 존재
늘 불안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두통과 가슴의 압박감을 호소하는 주영희씨는 36세의 주부다. 가슴의 압박감 때문에 3년 동안 심장병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불면증에 대해서도 내과에서 심장약과 함께 수면제를 처방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환자의 경우에도 최면에 의한 다중인격 진단 과정에 숨어 있던 어떤 존재가 드러났고, 그 다음의 상황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다.
김:자신이 누군지 얘기해봐요.
주:(떨리는 목소리로) 제 이름은 박진숙이고… 32살이에요.
김:왜 이 사람 속에 있어요?
주:저는 심장병으로 죽었어요… 병원에서 죽었는데… 이 사람이 그 병원에 왔을 때… 들어왔어요.
김:왜 이 사람에게 들어왔어요?
주:갈 데가 없어서요….
김:이 사람이 당신 때문에 심장병 증세가 생긴 건가요?
주:네… 제 가슴이 아픈 것이 이 사람에게 전해져서 그래요.
김:불안하고 잠을 못 자는 것도 당신 때문인가요?
주:네.
김:당신이 나간다면 나을 수 있겠군요?
주:네. 나을 수 있어요… 저도 이 사람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어지는 과정에 적절한 대화와 치료기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박진숙이라고 주장하던 존재를 환자로부터 떠나게 했다. 그랬더니 환자가 앓던 가슴 통증과 심장 압박감이 없어졌고 그에 따라 우울과 불안도 사라져버렸다. 이 모든 과정이 한 번의 치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3년간 복용해오던 심장병 약과 수면제를 끊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첫 치료를 마친 후 환자가 놀란 얼굴로 “몇 년 전 아버지가 어느 대학병원에 입원하신 일이 있어 문병을 수차례 간 적이 있었는데 제 가슴이 뛰는 증상도 그 무렵부터 생겼어요”라고 얘기했다는 사실이다.
어느날 문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가슴이 뛰면서 ‘이러다가 심장마비가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느닷없이 생겼고 그때 이후로 그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환자는 두어 번 더 면담과 최면치료를 받았고 증상이 없어진 뒤에야 치료를 끝낼 수 있었다.
자신이 심장병으로 죽은 아무개라고 말하던, 환자 내면에 있던 미지의 존재가 환자가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인지 분리된 다중인격인지 혹은 미지의 존재 주장대로 외부에서 들어온 영적인 존재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존재의 주장을 받아들이려면 우선 ‘그렇게 들어올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외부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이 점이 바로 정신과 의사들에게 가장 거부감을 주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주장을 무시하고 환자 내면의 어떤 갈등이 그런 다중인격을 만들어냈다고 미리 결론을 내린 후 정신분석을 하는 것은, 현상을 무시하고 증명도 되지 않은 이론에 환자를 꿰어맞추는 꼴인 셈이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그 존재의 말을 일단 그대로 믿고 치료를 진행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빠른 치료효과를 가져왔다. 또 다른 사례 하나를 살펴보자.
몸속에 들어온 친척
24세의 미혼여성인 강현미씨는 오른 쪽 어깨부터 팔 전체에 걸쳐 조이는 듯한 통증과 무력감으로 오른팔을 거의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3년반 전에 친척 아저씨가 돌아가셔서 그 집에 문상을 다녀온 날 밤 아주 무서운 꿈을 꾸었고 아침에 일어나자 팔이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다고 했다. 불안감과 대인공포증도 생겼다고 했다. 처음 필자를 방문했을 때는 거의 외출도 못 하고 집안에서만 지내고 있는 상태였다. 발병하기 전에는 활달하고 적극적이었으며 직장에도 잘 다니고 있었다고 했다.
여러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수차례 받았지만 결론은 언제나 신경성이라는 꼬리를 달고 있었다. 이 환자에게서도 역시 내면에 숨어 있는 다른 존재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와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김:당신이 누군지 얘기해봐요.
강:(화가 난 남자 목소리로 얼굴을 붉히며)나는 이 아이의 당숙되는 사람이야….
김:그런데 왜 이 사람 속에 들어가 있어요?
강:(비웃듯이) 이 아이를 데려가려고….
김:데려가긴 어디로 간다는 거죠?
강::나하고 같이 가야지… 얘도 죽어야 해… (어이가 없는 듯한 목소리로) 당신이 뭔데 참견이야?
김:그럼, 이 사람이 아픈 것도 당신 때문인가요?
강:(웃으며) 그렇지, 내가 끌고가려고 팔을 잡고 있으니까 팔이 아픈 거야….
김:당신만 떠나면 이 사람도 낫겠군요?
강:그야 물론이지….
김:그만큼 괴롭혔으면 이젠 놔줄 때가 됐죠?
강:(화가 났지만 갈등이 생기는 듯) 그렇긴 하지… 이 아이 부모가 나한테 잘못한 일이 많아… 얘는 억울하게 아픈 거지.
이어지는 대화에서 계속 나가라고 설득하는 필자에게 이 존재는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결국은 마지못해 나가겠다고 했다.
김:(환자에게) 그가 나가는지 느껴보세요.
강:네… 가고 있는 뒷모습이 보여요. 화난 얼굴로 자꾸 뒤돌아보는데… 점점 멀어져가요… 이젠 안 보여요.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조치를 몇 가지 더 취한 후 환자를 깨웠을 때 환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해 있었다.
“제 안에 있던 존재는 제가 문상갔던 그 아저씨였어요. 가끔 무서운 얼굴로 꿈에 보였는데…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치료에 있어서 환자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점이 아니다. 낫느냐 안 낫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의학은 실용학문이기 때문에 어떤 치료과정 이후에 환자가 회복된다면 그 방법의 실용가치를 일단 인정하고 연구해야 하며, 낫지 않는다면 뭐가 문제인가를 다시 따져봐야 한다.
이 한 번의 치료 이후 환자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최면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오른 팔의 통증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인공포증과 기피증도 덩달아 없어졌다. 치료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취직해서 잘 다니고 있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치료를 마친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
이 환자 속에서 얘기하던 존재가 정말 죽은 당숙아저씨의 영혼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환자 내면의 존재가 주장하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치료에 이용한 것이 이런 극적인 회복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자신이 환자의 당숙이라고 했던 그 존재의 말을 믿지는 않는다.
이 경우처럼 죽은 친지나 조상의 모습으로 환자 앞에 자기를 드러내는 존재가 많지만 최면상태에서 더 면밀하게 파고들어가 보면 대부분 거짓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무속인이나 일부 종교인들이 “조상령이 씌웠다”고 하는 경우나 “오래 전에 죽은 친척의 영혼이 붙었다”고 하는 말들은 모두 이런 상황을 잘 몰라 일어나는 촌극이다. 실제 예를 들어보자.
‘조상령이 씌웠다’의 허구성
우울증을 앓고 있는 25세의 여자인 유승희씨를 최면 치료하던 중 알 수 없는 존재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유:(늙은 여자의 목소리로) 왜 나를 자꾸 괴롭히는 거야?
김:당신이 누군데?
유:나는 이 아이의 할미야….
김:이 사람의 할머니라고요?
유:그래….
김:그런데 왜 손녀를 괴롭히죠?
유:(찡그리며) 괴롭히는 게 아니고, 내가 얘를 도와줘야 해… 이 아이는 아주 약하거든.
김:정말 손녀를 위한다면 여기 있어서는 안된다는 걸 알죠?
유:(화가 나서) 그래도 난 여기 있어야 해.
김:당신 때문에 이 사람이 고통을 받는데도?
유:(이를 악물고) 그래도 할 수 없어….
김:당신은 이 사람의 할머니가 아닐 거야…내 말이 맞지?
유:(비꼬듯이 웃으며) 어떻게 알았지?…그래, 나는 이 아이의 할머니가 아니야…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어?
이런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외부에서 들어온 누구라고 주장하는 다중인격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중인격 중에는 환자가 알고지내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실례를 살펴보자.
자신감 결여와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 공황 발작을 호소하며 치료를 시작한 30세의 남자인 이태욱 환자의 경우, 최면치료 도중 그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존재가 나타나 얘기를 시작했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고향집에서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김:당신에 대해 얘기해봐요.
이:(나이든 여자의 말투로) 나는 이 사람 엄마예요….
김:여기서 뭘 하고 있죠?
이:내 아들을 돌보고 있어요… 얘는 날 필요로 해요.
김:당신이 안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있나요?
이:(답답하다는 듯) 얘는 혼자서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해요… 내가 도와주고 야단을 쳐야 해.
김:이 사람이 늘 주눅들어 있고 우울한 게 당신 때문인가요?
이:(화를 내며) 자기가 못나서 그렇지 왜 나 때문이야?
이상한 존재들
이 경우에도 환자의 엄마라는 존재를 내보내고 난 후 여러가지 증상이 단기간에 호전되었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었던 환자는 지배적이고 드센 어머니 때문에 늘 주눅이 들어 지내왔고 자존심 상하는 언어폭력을 자주 경험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 혼자 서울에 올라와 있었지만 항상 어머니가 자기를 감시하며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같아 더 우울했다고 한다. 정말 살아 있는 어머니 영혼의 조각이 아들에게 들어올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대답할 수 없겠지만 만일 이런 현상이 실제로 존재하다면 옛날부터 쓰이던 주술이나 저주·마법도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사례에 대해 필자와는 다른 식의 해석을 하는 정신과 의사도 있을 것이다. 이는 18세기 이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부터 초현상적이거나 검증될 수 없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는 학문적 분위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주류를 이루어온 현대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난치 환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현대의학의 한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방법으로 낫지 않던 환자들이 앞에서 살펴본 치료과정을 거친 후 회복된다면 그 치료과정 뒤에 어떤 작용이 숨어 있는가를 찾아봐야 한다.
실제로 일부 현대 의학자들은 다시 영혼이나 귀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다.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무수한 증거가 있는데도 빙의의 가능성을 무시하려는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 언젠가 이 주제는 다시 등장할 것이 확실하다”고 오래 전에 예견했다.
현재 다중인격치료의 선구자로 꼽히는 랄프 앨리슨(Ralph Alison)은 필자와 마찬가지로 “많은 다중인격 환자들이 사실은 빙의 환자”라고 주장하며 환자의 내면에서 분리된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이상한 존재들과의 만남을 기술하고 있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아서 거드햄(Arthur Guirdham)도 “귀신들림이나 영적인 간섭이 신체적·정신적 질병의 많은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많은 정신의학자들이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며 치료사례들을 발표하고 있다.
미국에는 이 분야의 연구를 위해 설립된, 윌리엄 볼드윈(William Baldwin) 주도의 빙의치료협회(Association for Spirit Releasement therapy)가 있고, 필자가 아는 한 국내에서 이 분야를 깊이 연구하고 있는 조직은 앞에 소개한 ‘한국임상최면학회’뿐이다.
초개아적 심리학이란?
아인슈타인 이후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현대 물리학의 여러 분야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견하고 있지만, 이 발견들이 아직은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에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 의학자들도 이런 분야의 새로운 발견들을 도입하여 새로운 치료법 개발이나 진단에 응용해야 한다.
이런 필요성에 의해 1970년대에 탄생한 초개아적 심리학(超個我的 心理學, Transpersonal Psychology)은 지금까지의 심리학과는 달리 영혼이나 사후세계, 전생의 기억, 임사체험, 빙의와 초현상 등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을 받아들이고 연구하며 유용하다면 현대 물리학의 이론을 도입하여 인간의 의식을 이해하고 각종 대체의학의 치료기법들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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