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바꿀 수 있을까? 없을까?
1. 숙명과 운명
보통 사람들이 말하기를, “숙명은 바꿀 수 없지만 운명은 바꿀 수 있다.”라고 한다. 정말로 그러할까? 숙명宿命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이라 하고, 운명運命이란 ‘운수運數와 명수命數’라 한다. 사주팔자와 연관된 길흉화복을 명수라 말한다면 대운 세운 등과 연관된 길흉화복을 운수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2. 사주 관상과 심상
또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주가 관상만 못하고(四柱不如觀相) 관상이 심상만 못하다.(觀相不如心相)”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임에 따라 그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얼굴에 표정으로 나타나면 관상가는 그 기색氣色을 살피고 길흉화복을 예단할 것이다. 수시로 변화하는 형상을 잡아내는 데는 아무래도 관상이 사주보다 더 낫다는 판단 아래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심상을 보는 일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심상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3. 혜충국사와 대이삼장의 법거량
불교에는 신통神通이란 것이 있다. 대승에서는 육신통六神通이라 말하고 일승에서는 십신통十神通이라 말한다.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 누진통을 육신통이라 한다.
중국 당나라 숙종 연간(756.~762.)에 서천西天의 대이삼장大耳三藏이 당시 수도首都인 장안에 와서 “내가 타심통을 얻었노라.”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타심통他心通이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능력이다. 숙종이 남양 혜충국사를 청하여 시험해보라고 권유했다. 국사가 묻고 삼장이 답했다.
“그대가 타심통을 얻었는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대가 일러보라. 노승의 마음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화상은 한 나라의 국사이시거늘 어찌 서쪽 시냇가에 가서 배 젓는 경기를 구경하십니까?”
“그대가 일러보라. 노승의 마음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화상은 한 나라의 국사이시거늘 어찌 천진교天津橋 위에 가서 원숭이 놀음을 구경하십니까?”
“그대가 일러보라. 노승의 마음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국사의 세 번째 질문에 삼장이 국사의 마음이 간 곳을 알지 못하자 국사가 삼장을 꾸짖었다.
“저 들 여우의 귀신이로다. 타심통이 어느 곳에 있다는 말인가?”
삼장이 아무 대답도 못 했다.
4. 심상의 동상과 부동상
남양 혜충국사는 청원행사 남악회양 영가현각 하택신회 등과 함께 육조대사의 수제자 중에 한 분이다. 무릇 도인이라면 잡념雜念을 쓰는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선정을 수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혜충국사가 대이삼장과 법거량法擧揚을 할 당시에 마음을 서쪽 시냇가에 두고서 배 젓는 경기를 구경하기도 하고 천진교 다리 위에 두고서 원숭이 놀음을 구경하기도 한 것은 일용삼매日用三昧 속에서 잡념을 일으켜 썼다고 볼 수 있고, 세 번째 잡념을 쓰지 않고 부동한 경계를 보인 것은 자수용신삼매自受用身三昧를 썼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전자는 생멸심生滅心이고 후자는 부동심不動心 또는 근본심根本心이다. 전자는 선정 속에서 지혜를 쓴 것이고, 후자는 지혜 속에서 선정을 쓴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위 문답에 의거하면 혜충국사와 대이삼장은 모두 천안통과 타심통 숙명통이 열렸다고 판단할 수 있다. 범부의 분상에는 신통력이 없고 보면 남의 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심상心相이 부동상不動相에 상당하겠지만, 도인의 분상에는 남의 마음을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심상이 동상動相도 되고 부동상이 되기도 한다. 곧 도인의 심상은 도인이 아닌 범부로서는 사주나 관상으로 분별하여 적용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5. 사주와 관상의 적용 범위
먼저 마음이 움직이고 움직이는 마음을 따라 얼굴에 기색氣色이 나타나면 관상가는 그 기색을 살펴서 길흉회복을 판단할 것이며, 명리학자는 움직이는 마음을 십신의 생극제화와 연결시켜 길흉화복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혜충국사와 같은 대수행인大修行人이 되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마의대사 같은 상학자도 그 기색을 살피지 못할 것이며, 아무리 뛰어난 명리학자일자라도 십신 사이에 상호 생극제화의 작용을 적용하여 길흉화복을 논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주나 관상은 오욕락을 추구하고 오욕락에 속박되는 범부에 한정하여 적용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찰색에 대하여 한마디 더 언급하고자 한다. 고귀한 사람에게는 수승한 상호相好가 있다. 모든 부처님은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고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며 지혜와 자비를 구족한 양족존兩足尊이기 때문에 한량없는 대인상大人相을 구비하고 있다. 이를 인간은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 보고, 천상은 팔십종호八十種好로 보며, 십지보살은 불가설 미진수 대인상으로 본다. 그러나 십지보살일지라도 양족존의 구경상究竟相을 보지 못한다. 십지보살이 백천삼매를 써도 보현신普賢身을 보지 못하는데, 어찌 양족존의 불가설 미진수의 대인상과 각 대인상마다 딸린 불가설 미진수의 수호공덕상隨好功德相을 볼 수 있겠는가. 심상은 부동상이고 상호相好는 동상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동상에도 부사의한 경계가 있는 것이다. 이를 어찌 관상가의 찰색으로 논단할 수 있겠는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6. 공선생이 본 요범 거사의 운명
명나라 원요범袁了凡(1533.~1606.) 거사는 정좌요결靜坐要訣과 요범사훈了凡四訓을 저술했다. 정좌요결이 수행인의 전문서라면 요범사훈은 일반인의 교훈서라 할 수 있다. 소강절 선생의 황극수정전皇極數正傳에 달통한 공선생과 요범 거사의 인연은 아래와 같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내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하여 공부하기보다는 의학醫學을 배워서 생활을 하고 남을 돕는 것이 좋다고 설득하셨다. 아마 나는 의학에 정통하여 유명해지고 나에 대한 아버지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자운사慈雲寺에서 고귀한 모습의 나이든 분을 만났다. 그 분은 긴 수염을 기른 성자처럼 보였다. 나는 즉시 그 분에게 인사드렸다. 그 분은 나에게 말했다.
“그대는 관리가 될 운명을 타고 났소. 내년에 그대는 학궁學宮에 진학할 것이오. 왜 시험공부를 안 하오?”
내가 그 까닭을 말씀드렸다.
나는 이 노인에게 이름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오셨는지 물었다. 그분은 대답하시길, “나의 성은 공씨孔氏이고 운남雲南에서 왔소. 나는 점성술과 예언에 관한 매우 정확하고 신성한 책을 물려받았소. 이 책은 소자邵子가 쓴 황극수정전皇極數正傳이라고 불리고 있소. 내 생각에는 이 책을 그대에게 물려주고 사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소.”라고 하셨다.
나는 공선생을 집으로 초대하여 어머님께 말씀드렸고 어머님은 그 분을 잘 모시라고 했다. 우리가 공선생의 예지능력을 시험해봤는데, 큰일이나 일상생활의 작은일이건 그 분의 예언은 정확했다. 나는 그 분이 말씀하신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다시 시험공부를 시작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사촌과 상의했는데 그는 자기 친구의 집에서 머물며 가르치고 있는 욱해곡郁海谷 선생을 추천하였다.
공선생은 나를 위해 몇 가지 더 계산을 하였다. 그 분은 내가 현縣에서 보는 동생고시童生考試에 14등을 하고, 부府에서 보는 고시에는 71등을 하고, 성省에서 보는 제학提學 고시에는 9등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 해에 나는 이 세 시험에서 공선생이 예언한 석차席次를 했다.
나는 다시 공선생에게 내 남은 인생에 대하여 예언해 주기를 부탁드렸다. 공선생은 계산 후 내가 이러이러한 해에 이러이러한 시험에 합격하고 어떤 해에 품생稟生이 되고 어떤 해에 공생貢生으로 승진하고, 나중에 사천성四川省의 대윤大尹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이 지위에 3년 반 근무한 후,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오게 되어 있다. 나는 53세 되던 해 8월 14일 축시丑時에 죽게 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자식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분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잘 기록하고 기억하였다.
모든 시험 결과는 예언대로 나타났다. 공선생은 또 내가 봉급으로 모두 쌀 아흔 한가마 다섯 되(91石 5斗)를 받은 후에야 승진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내가 일흔 한가마(71石)를 받자 도종사屠宗師가 내 승진을 추천하였다. 나는 속으로 예언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종사의 후임이 이 승진을 기각하여 결국 예언이 맞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새로 부임한 은종사殷宗師가 내 시험 답안을 보고 “이 다섯 답안은 황제에 올린 보고서로 훌륭하다.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비를 묻혀둘 수 있겠는가?”하고 탄식하였다.
새 종사는 현감에게 내가 그의 권한으로 공생貢生이 되도록 공문을 작성하도록 요청했다. 이 복잡한 승진 후에 내가 계산해보니 정확히 91가마 5되를 받았다. 이때부터 나는 승진이건 강등이건, 부자가 되건 가난해지건 모두 때가 되면 이루어지고 사람의 수명도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나는 모든 일을 초연하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소득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
공생貢生이 된 후에, 나는 북경에서 1년간 공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서울에 1년간 머무는 동안 명상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자랐고 가끔씩 아무런 생각도 없이 침묵 속에 앉아 있곤 했다. 나는 책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고 전혀 공부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 해에 나는 남경에 갔다. 그 곳에서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기 전에 나는 서하산捿霞山의 존경받는 선사인 운곡雲谷 스님을 찾아뵈었다.(37세 1569.) 우리들은 사흘 밤낮 자지 않고 마주 보면서 선방에서 좌선하였다.
7. 공선생의 허물
요범 거사는 공선생이 예언한 53세에 죽지 않고 74세까지 20여년을 더 살았다. 사람들은 요범 거사가 운곡 선사를 만난 뒤로 개운開運하여 천수를 누렸다고 말한다. 공선생의 예언은 운명 또는 숙명이 되고, 천수를 누린 것은 숙명 또는 운명을 바꾼 것이 된다고 말한다. 만일 요범 거사가 먼저 운곡 선사를 만나고 나중에 공선생을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요범 거사의 숙명이나 운명은 53세가 정명定命이 아니고 74세가 정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하다면 공선생의 허물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요범 거사의 선근善根을 살피지 못한 데에 있다. 운곡 선사는 요범 거사로 하여금 선세先世의 업장을 소멸하고 선근을 장양長養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사주나 관상 등의 운명추수학運命推數學에 의거하면 오욕락을 추구하거나 속박되는 틀 가운데 생극제화의 작용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53세가 요범 거사의 정명이 될 수 있지만, 인연을 따라 다가오는 길흉화복을 소멸하거나 장양할 수 있는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74세가 정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세간에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운명은 전자를 말하는 것이다.
8. 지나간 세월은 숙명이고 다가올 세월은 운명이다.
숙명이란 무엇이고, 운명이란 무엇인가? 지나간 세월은 모두 숙명이라 정의할 수 있고, 다가올 세월은 일부나마 운명이라 정의할 수 있다. 누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 극악極惡한 사람이나 지선至善한 사람이다. 극악한 사람은 나쁜 길로 운명을 바꿀 것이고, 지선한 사람은 좋은 길로 운명을 바꿀 것이다.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타고난 운명의 길을 따라간다고 말할 수 있다.
오욕락의 틀 속에서 청귀한 족속들이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길을 밟아나갈 따름이다. 만일 오욕락을 추구하거나 속박되면 운명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운명의 틀을 좋은 방향으로 벗어나고자 하면 오욕락이란 울타리를 벗어나야만 가능하다.
9. 보원행과 수연행
달마대사는 사행론四行論에서 도문道門에 들어가는 방법을 이입理入과 행입行入 두 가지로 한정하여 말하고 있다. 행입 중에 사행이 있는 바 백천만 가지 행이 모두 이 사행 속에 포함된다. 보원행報怨行과 수연행隨緣行 무소구행無所求行 칭법행稱法行이 네 가지 행이다. 보원행과 수연행을 인용하고자 한다.
도행道行을 닦는 사람이 만일 고통을 받을 때에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기를, “내가 과거 지나온 한량없는 겁 가운데 근본을 저버리고 지말을 좇아서 육도를 윤회하며 수많은 원증怨憎을 일으키고 한없이 남을 위해違害하며 지내왔다. 비록 금생에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지금 수많은 고통을 받는 것은 내가 숙세에 지은 악업의 열매가 익어서 나타난 것이며, 하늘이나 타인이 이를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참고 받아들이며 전혀 하늘이나 타인을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경에 이르기를 “괴로운 과보를 만나도 근심하지 않는다.(逢苦不憂)”라고 하였다. 어째서 그러한가? 업식業識이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길 때 이치로 더불어 상응하고 원심怨心을 체달하여 도문에 나아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보원행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둘째는 수연행이다. 중생이란 참나가 없고 아울러 업식을 반연하므로 육도에 유전流轉하며, 고락苦樂을 함께 받는 것도 모두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다. 만일 수승한 과보나 영예 등의 일을 얻을지라도 이는 나의 과거 숙세에 인연이 감응한 것이며, 지금에야 비로소 이를 얻을지라도 그 수승한 인연이 다하면 오히려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어찌 이를 기뻐하고만 있겠는가. 얻고 잃음이 인연을 따르는 줄 알고서 마음에 증감增減이 없어지고 희풍喜風에도 부동하며 그윽이 도를 수순隨順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연행이라 말씀한 것이다.
10. 결론
이제 결론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운명은 바꿀 수 있는가? 바꿀 수 없는가? 또한 숙명은 전혀 바꿀 수 없는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영역인가? 아니면 숙명도 바꿀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기 전에 운명과 숙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숙명을 바꿀 수 없다거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도대체 바꿀 수 없다는 당신의 숙명은 무엇이며, 바꿀 수 있다는 당신의 운명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어떠한 현인도 숙명통이 열려 있지 않다면 당신의 운명과 숙명이 이것이라고 단정하여 말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운명과 숙명이 이것이라고 명확히 분별하여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숙명은 바꿀 수 없다고 말하거나, 운명은 바꿀 수 있다고 말하거나, 또는 숙명과 운명은 모두 바꿀 수 있다고 말하거나 없다고 말하는 등의 가설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숙명이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면 상견常見에 떨어질 것이고, 숙명이나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면 단견斷見에 떨어질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연을 말한다. 인연과因緣果를 줄여서 보통 인연이라 말하기도 하고 인과라 말하기도 한다. 원인이 있어서 반연을 만나면 결과가 나온다. 과거 한량없는 겁 이전부터 미래 한량없는 겁 이후까지 인연과가 무수히 반복되는 과정을 밟으며 살아가는 것이 중생이다.
범부는 순행하고 도인은 역행한다. 범부는 순행하기 때문에 인연과를 따라 끝없이 육도에 윤회하는 것이고, 도인은 역행하기 때문에 인연이 다가오면 바로 마음을 돌이켜 쓰는 찰나에 육도의 윤회를 끊는 것이다. 마음을 돌이켜 쓰는 방법 중에 하나가 위에서 말한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이라 일컫는 사행이며, 무소구행과 칭법행은 전문 수행자라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세간에서 오욕락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범부의 분상에는 보원행과 수연행부터 닦아나가면 될 것이다. 대수행인은 오른발을 계단 위에 올려놓으면 지혜를 향상시킬 것이고, 왼발을 계단 아래 내려놓으면 자비를 증장시켜 나갈 것이며, 비록 초심학자일지라도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지혜와 자비를 갖추어나가다 보면 구경에는 양족존이 되는 것이다.
http://cafe.daum.net/egrang/SWwG/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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