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출신 중봉 조헌 선생 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그 동안 학자, 정치개혁가, 문인(시인), 의병장 등으로 인식되어 왔다.
조헌 선생은 예언가로서 또 다른 모습을 갖고 있었음을 지나칠 수 없다. 어쩌면 학자로서, 정치개혁가로서 그의 진면목은 도가사상에 뿌리를 두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해본다.
‘예언가'로 활동한 새로운 조헌선생을 만나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 선조25년(1592) 8월1일자 기사는 조헌이 ‘예언가임을 말해주고 있다. 기사 제목을 보면 ‘조헌이 천문과 인사의 길흉을 헤아렸다’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제목으로만 보면 분명 조헌은 천문, 지리에 밝은 ‘예언가'로 나타난다.
“<중략>그러나 그 계책이 채택되지 않자 밤마다 천문(天文)을 우러러 살피면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온종일 먹지 않기도 하였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늘 처자로 하여금 무거운 것을 지고 걷는 일을 연습하게 하였으며, 또 문인(門人)으로 하여금 글을 읽는 여가에 날마다 30리씩 걷는 연습을 시키면서 말하기를 ‘머지않아 왜적의 난리를 피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시급한 업무이다’ 하였는데, 문인들이 모두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는 예언의 내용으로써 30리씩 걷는 연습을 시켰다는 것은 피난준비를 했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조선의 성리학자로 볼 수 없는 행동거지다.
하늘의 징조를 보고 천문을 예언
계속해서 같은 자료의 내용이다. “<중략>신묘년(1591/선조24년) 가을에 문인 박정로(朴廷老)와 함께 금산사(金山寺) 누각에 올랐는데, 붉은 기운 세 가닥이 하늘 북쪽에 길게 뻗치고 서남쪽으로 반쯤 뻗쳐 있는 것을 보고 박정로에게 말하기를 ‘수길(秀吉)의 군사가 이미 움직였으니 내년에 틀림없이 이 기운처럼 대대적으로 침입해 올 것이다. 모름지기 일찍 피난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 해 봄에 선조의 묘소에 성묘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하며 난리가 일어날 것이므로 하직한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 뒤 처(妻)의 장례를 치르려고 친척과 빈객이 와서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우레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에 ‘왜병이 바야흐로 바다를 건넜다’ 하고는 장례를 재촉하여 끝내고 공주(公州)로 돌아왔는데, 적이 과연 그날 우리 지경을 침범하였다” 조헌이 하늘의 징조를 보고 즉 천문 예언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또한 조선 인조 때의 문신 김상현의 시문집인 청음집★ 제28권 ‘고(故) 의병장(義兵將) 증(贈) 이조판서 중봉(重峯) 조선생헌(趙先生憲)의 신도비명 병서’에도 조헌의 예언에 대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